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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추천 도서

부탁하노니, ‘이십 대’ 가 스스로 말하게 하라


이십대 전반전
문수현 외|골든에이지


‘이름붙임’의 힘은 크다. 김춘수의 <꽃>에서 나오듯 이름을 안 붙이면 그저 몸짓이므로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또 이름붙임은 다른 효과도 낳는다. 그 이름으로만 그들이 보이는 것이다. 자꾸만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애인에게 호칭으로 ‘자기야’라고 했을 때 부르는 어감과 ‘ ~씨’라고 부르는 어감은 확연히 다르다.
‘88만원 세대’, ‘ G세대’. 요즘 한참 이십 대(통상 80년대 생)에 대해 이름 붙이는 단어이다. 이 말들은 두 가지 다른 맥락에서 나왔다. 이십 대의 평균 임금의 열악함과 그들에게 힘들 수밖에 없는 경제적 구조.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다양한 경험과 외국어 구사능력, 웹 공간의 활용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세대. 이 두 가지 말은 이십 대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일까? 적절한 ‘이름붙임’일까? 양보해서 두 말이 동시에 가능하다고 할 때 그 틈새는 없을까? <이십대 전반전>의 저자들은 그 두 가지 표현 모두 거부한다. 함부로 이름 붙이지 말라는 말이다. “88만원 세대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정작 당사자인 20대들은 기성세대의 세대 담론에서 소외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땅의 20대들은 가엾고 움츠러든 존재로만 남아 떠돌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경제적 현실을 고발하려던 의도는 우리들의 모든 실존적 고민을 경제적 불안이란 범주로 우겨 넣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8쪽). 함부로 단정 짓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들의 삶에 대해 그들이 이야기하는 그 자체를 들어주라는 이야기다. 생각해 보면 <88만원 세대>를 쓴 우석훈의 시선과, G세대론을 말한 <조선일보>의 기획은 서로 다른 목표를 위해 쓰였지만, 사실 그 말들에 이십 대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최소한은 그러한 이름붙임에 대해 이십 대가 말할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지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십 대의 자기 발언은 손쉽게 기성세대의 발언을 위한‘ 재료’로만 쓰였다. 완결된 이십 대들의 자기 목소리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이십대 전반전>의 저자들은 서울대 사범대의 <교육평론>이라는 교지의 필진이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또한 손쉽게 이름붙임의 폭력을 저지를 수도 있다. “얘들은 서울대니까 이렇게라도 말하지. 잘난 척은!” 하지만 저자들은 단순히 ‘서울대’의 상징만으로 ‘이름붙임’을 거부한다. 신림동의 반지하 방에 산다는 것. 그들에게도 똑같이 닥치는 자본주의 사회의 끔찍함에 대한 구체적인 자기들의 말은 우리에게 공감을 일으킨다. 그리고 손쉽게 이십대를 욕하는 시도에 대해 거부하고, 오히려 이십 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세상에 대해 ‘욕할 권리’를 화두로 던진다.
대화를 위한 기본은 상대의 이야기를 그(녀)의 맥락에서 들어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기성세대의 기준으로 이십 대에게 물었다면, 이제는 이십 대가 기성세대에게 질문한다. 기성세대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제는 뒤집힌 질문이 필요할 때다. 글 양승훈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은종복|이후

성대 앞에 놀러 가는 사람들 중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풀무질>에 들른다. 은종복 아저씨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동화책을 권해주고, 청년들에게는 좋은 문학과 인문사회과학책을 권해주는 은종복 아저씨와 만나고 나면 한없이 그 하루가 맑아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아저씨는 또 하나의 선물을 주시기도 하는데 그건 바로 아저씨가 쓴 글이다. 매주 한 두 편씩 책을 읽은 소감과, 요즘 세상을 살면서 느낀 바들을 적어서 주는 글인데 그 글을 읽고 나면 한주가 맑아지는 것만 같다. 그 글들을 묶어 책으로 냈다. 책을 읽고 나면 1년이 맑아지지 않을까!


이반 일리히의 유언
이반 일리히, 데이비드 케일리|이파르
크리스천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교육과 자본주의와 기독교에 대해 늘 말했던 사상가인 이반 일리히의 ‘유언’이다. 가장 중요한 그의 가르침은 아무래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한 관용과 새로운 윤리의 요청이었다. 그것들을 자꾸만 망각하고 ‘자본교’와 관계 맺음을 하는 서구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지금도 우리와 그리 멀리 떨어져 보이지 않고 외려 가까운 곳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크리스천의 새로운 ‘ 따뜻함’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면 꼭 읽어볼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