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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길에게 길을 묻다

동, 서의 색이 만나는 희망의 도시 케이프타운

2010년 월드컵이 열리는 도시이기도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두 시간 걸려 도착한 케이프타운의 첫인상은 너무나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다. 맑은 하늘과 잘 어울리는 짙은 녹색 잔디밭. 도시에서 손을 뻗으면 잡힐 듯이 가까운 아름다운 바닷가.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케이프타운의 상징인 테이블 마운틴. 도시 어디에서나 보인다는 테이블 마운틴은 1,087m 높이의 케이프타운 남쪽에 위치해 있는 산이다. 겨울철에는 ‘테이블 크로스’라는 흰 구름이 산정에 자주 나타나기도 한단다. 테이블 마운틴에서 내려다보는 케이프타운의 전망은 죽기 전 반드시 보아야 할 장관으로 칭송 받는다.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직접 오르는 방법과 산등성이를 거의 수직으로 오르는 360도 회전 원형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테이블마운틴의 정상은 동서로 3킬로미터나 뻗어 있어 꼭대기의 평평한 고원을 둘러보는 데만 해도 3시간가량이 소요된다. 케이블카 입구에 서면 서쪽으로 시그널 힐, 라이온스 헤드의 전망과 대서양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열두사도 봉우리가 산의 서쪽 면을 받치고 있다. 방향을 바꿔 동쪽으로는 산봉우리가 악마처럼 생겼다는 데블스 피크와 케이프타운 시내 전경이 펼쳐진다. 테이블마운틴에 올라 바라보는 바다와 파도 거품과 하늘, 마치 물감을 타 놓은 듯한 파랑이 내 눈을 채운다. 그리고 그곳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는 켜켜이 둘러싸고 있는 산봉우리. 어느새 나는 지금 밟고 서있는 곳이 산의 정상이라는 것까지 잊고 말았다. 산 정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평한 느낌이다. 어쩌면 이곳은 그분이 나를 위해 베푸신 축복의 만찬에 초대를 받아 테이블을 앞두고 앉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동안 발을 뗄 수 없었다.

경쾌한 색으로 도시를 덧칠하다
케이프타운 시내에서 테이블 마운틴으로 가는 길을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마치 경쾌한 색의 미술 구성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일군의 주택가를 만나게 된다. 테이블마운틴의 한 줄기인 라이언 헤드와 시그널 힐의 산자락을 따라 발달한 이 마을은 케이프타운의 명물 중 하나인 보캅이다. 보캅은 upper cape라는 뜻의 아프리칸스어로 언덕 위 높은 곳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보캅 지역은 말레이 쿼터케이프 말레이라고 불리는 사람. 자바나 인도네시아 발리, 말레이시아 등에서 이주해온 조상의 후손들라 불리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어 약만여 명 정도가 살며 그 중의 70퍼센트가 무슬림들이다.
도로를 따라 양 옆으로 자동차 행렬이 줄을 지어 있는 것이 보캅의 특징이다. 또하나 이색적인 것은 집집마다 스투프STOEP라고 하는 현관문 앞의 조그만 테라스다. 무슬림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경쾌하고 컬러풀한 색으로 칠한 집 외부, 그리고 강렬한 색으로 대비를 주며 칠한 내부 역시 보캅 지역만의 독특함인데 관광객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와인향에 물들다
케이프타운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을 들 수 있는데 그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다. 자동차를 타고 외곽지역에 끝없이 펼쳐진 포도농장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다. 사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포도재배와 와인양조역사는 350년이 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에게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단지 와인 세계의 뉴 월드로 인식되어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1994년에서야 남아공의 와인 산업이 국영화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14년 만에 스텔렌보쉬 지역을 중심으로 생겨난 와이너리는 현재 550여 개에 달한다. 스텔렌보쉬산 포도주는 보르도나 부르고뉴와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는데, 그 포도주 맛의 비결은 시몬버그, 보틀러리 언덕, 스텔렌보쉬 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다 폴스만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으로 양질의 포도가 맺히는 데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펭귄을 만나다
동물원이 아닌 자연 서식지에서 펭귄을 볼 수 있는 행운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것도 아프리카에서 말이다. 케이프페닌슐라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사이먼스 타운의 보울더 비치에는 자카드 펭귄일명, 아프리칸 펭귄의 자연 서식지로 유명하다. 그 우는 소리가 마치 당나귀 같다 하여 자카드 펭귄이라 부른다. 1982년 불과 두 쌍에 불과했던 이곳의 펭귄은 이후 보호 정책에 의해 최근 3,000여 마리 정도까지 늘었다. 친절하게도 이 공원은 여러곳에 나무다리를 놓아 가까이서 펭귄을 볼 수 있게 한다. 해안을 따라 걸으며 자고 있는 펭귄, 알을 품고 있는 펭귄, 먹이를 먹으러 바다로 향하는 펭귄 등 여러 모습의 펭귄들과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운이 좋으면 함께 수영도 할 수 있다.
섭씨 30도가 넘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개구쟁이처럼 뛰노는 펭귄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저 모두 신기해 할 뿐이다. 개체수가 많이 늘어나 가끔 철없는 펭귄들이 주택가까지 찾아와 집을 어질러 놓기도 하지만 이곳 주민들에겐 그저 사랑스러운 동물일 뿐이다.

너와 내가 만나는 곶
케이프타운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은 바로 희망봉이다. 사람들은 흔히 희망봉을 남아공의 최남단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남아공의 최남단은 희망봉에서 동남쪽으로 160km 떨어진‘ 아굴라스 곶’이다.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지리적 공식 경계선도 당연히 아굴라스 곶이다. 그러나 역사적 의미와 심리적 측면, 그리고 해양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두 대양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저 희망봉이라고 하겠다.
내가 좋아하는 해안도로를 타고 오른 희망봉에서 본 바다는 그 색깔이 정확히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뉜다. 아니 나뉘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다. 바로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지점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다. 같은 곳에 있으면서 각기 다른 바다의 색이 하나되어 만난다는 사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디서건 만나는 축복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벌리니 바람이 내 몸을 타고 흐른다. 희망봉이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 때문인가? 아니면 정상에서 바라본 바다와 그 바다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길 위를 달리고 싶은 충동 때문인가? 갑자기 심장이 파도처럼 거세게 요동친다. 그렇게 나는 희망봉에 올라 맘껏 나를 발견하고 나를 위해 희망의 노래를 불렀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지만 눈을 감지 않았다. 눈물이 흐를 정도로 눈이 시렸지만 눈을 크게 뜨고 바다를 향했다. 하늘 아래 혼자인 이 시간이 눈물겹도록 감격스러웠다. 아프리카의 맨 끝에 서 있는 지금. 나는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만나고 시간과 만나고 또 희망과 만난다.


화려한 색속에 담겨있는 아픔
남아공에서 흑인들의 삶의 수준은 백인들과 비교하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직도 대다수의 흑인들은 빈민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이 지금 남아공의 현실이다. 백인 통치자에서 흑인 대통령으로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현실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 상황은 케이프타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시내의 좋은 지역은 주로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흑인들은 케이프타운 외곽에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찾아간 흑인 마을의 집들은 그 모양새가 한결 같다. 주로 양철로 엉성하게 만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그 모양이 난민촌을 방불케 할 정도다. 그러나 이곳의 집들을 보면서 나는 아프리카인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화려한 색을 좋아하는 아프리카인들의 특징을 나타내듯 비록 보기엔 허름하지만 이곳의 집들은 한결같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상황을 만들어가는 낙천적인 사람들. 그래서인지 흑인마을에서는 가난 보다는 열정으로 빛나는 이들의 미소를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케이프타운은 분명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관광지다. 그 아름다움을 가꾸고 지키려는 이들의 오랜 수고가 이곳을 아프리카의 유럽이라 불리게 했다. 오랜 기간 인권문제의 사각지대였던 이곳에서 2010년 처음으로 월드컵을 개최한다.
화려함 뒤에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아직도 가난에 허덕이는 흑인들의 고단한 삶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기에, 세계적 스포츠라는 행사를 통해 남아공이 새롭게 도약하기를 바란다.

신미식|디자인을 전공한 후 15년 가까이 그 분야에서 일해 왔다. 서른이라는 나이에 처음 카메라를 장만하고 사진에 미치기 시작하면서 17년 동안 세상을 향해 새로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며 여전히 여행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지독한 방랑벽을 소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