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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한페이지 단편 소설

하늘을 나는 책상과 마법의 노트

꿈을 꾸었다. 하늘을 나는 꿈을. 나는 비행기 안에 있지도 새가 되어 날고 있지도 않았다. 단지 하늘을 나는 책상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책상은 엄마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공부를 열심히 하라며 사준 오래된 마호가니 책상이었다. 신기하게도 꿈속에서 나는 그 책상에 꼭 맞도록 어려져 있었다.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책상아래는 구름이 지나가고, 바다가 지나가고, 산과 들이 지나갔다. 한동안 그것들을 구경하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지만 이내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거지? 하늘을 나는 책상은 언제 어디서 멈추는 것일까?
그 때 책꽂이의 어느 틈에서(아마도 <모모>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사이쯤이었을 것이다) 눈부신 빛이 반짝 거리더니 작은 바비 인형만한 요정이 나타났다.
“어디로 가는지 두려워 할 것 없어. 넌 이제 마술의 노트를 가지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요정은 요술 봉을 휘둘렀다. 그러자 내 책상 위에는 평범하게 생긴 노트와 칼로 깎은 연필이 나타났다.
“이제 네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을 이 마법의 노트에 적으려무나. 그럼 하늘을 나는 책상이 너를 어디든지 데려다 줄 것이란다. 한 페이지에 꼭 한 곳씩 적어야해. 그리고 잊지 말길. 노트의 쪽수는 정해져 있다는 것을.”
요정이 그렇게 말했으니 거짓말일 리는 없었지만 믿기지가 않았다. 어릴 적 엄마는 세상엔 착한 요정과 나쁜 요정이 있으니 항상 조심하라고 말했다.
나는 시험 삼아 요정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노트에 ‘샌프란시스코’라고 적었다. 그러자 노트에서 불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책상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나는 붉은 오렌지 빛깔의 금문교 위를 날고 있었다. 파리, 빈,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드니, 베이징, 도쿄 무엇이든지 그 노트에 적기만 하면 어느 곳이든 날아 갈 수가 있었다.
나는 많은 곳을 구경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모두 각자의 언어로 말을 했지만 우리는 가슴속의 텔레파시가 있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인 나에게 우정 어린 관심과 따스한 마음을 주었다. 사실, 새로운 곳의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는 일이었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더욱 신나는 일이었다.
그것을 깨닫게 되자, 나는 문득 내 정든 마을의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내가 사라진 것을 알고 나를 찾고 있지는 않을까. 엄마와 아빠는 실종신고를 했을지도 몰라. 내가 알고 있는 곳의 이름을 적어내려 간 노트는 이제 거의 다 써 버려서 마지막 한 페이지만 남겨져 있었다. 나는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에 우리 동네의 이름을 천천히 적었다. 아쉬움 때문인지, 반가움 때문인지 눈물이 약간 흘러내렸다. 뒤이어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부신 햇살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내 방엔 쓸쓸한 침대와 쓸쓸한 책상과 쓸쓸한 창문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꿈속의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당장 출근을 해야 하고 할 일이 쌓여 있는 서른 넷의 보통 사람일뿐이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 한참이 지나도 하늘을 날던 그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구름 속에서 휘날리던 바람, 대서양에서 지던 붉은 해, 스핑크스의 깨어진 코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그리고 여행을 하는 동안 만났던 많은 친구들과 인도에서 만났던 그 까무잡잡한 피부의 예쁜 여자아이이의 눈동자도…
나는 책상에 앉았다. 그것은 오래된 마법의 책상이 아니라 작년에 새로 산 반짝 반짝 빛나는 플라스틱 책상이었다. 책장에는 나중에 읽으려고-하지만 절대로 읽히지 않는-몇 권의 소설책들과 보기만 해도 따분한 서류들이 뒤얽혀 있었다. 나는 그 서류 뭉치 중의 하나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모나미 볼펜으로 뭔가를 하나씩 하나씩 적어내려 갔다.



서진|소설가, 한페이지 단편소설(일명, 한단설 1pagestory.com) 운영자.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1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 에세이와 소설을 결합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출간. 세상의 가장 큰 의문을 풀 책을 찾아 헤매는 북원더러Book Wanderer. 홈페이지는 3nightson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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