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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1 05-06 마음의 쉼표

마음의 쉼표 5│쉼을 천천히 마시다

제공 다락원


예부터 김치는 어머니 손맛, 정성이 들어가야 제대로 맛이 나는 음식이라고 했다. 어디 김치뿐이랴. 대량으로 찍어낸 것을 사다 먹는 음식과 집에서 해 먹는 음식은 맛이 다르고, 푸드코트에서 딩동 소리 들으며 정신없이 먹는 식사와 조용한 공간에서 차분하게 먹는 식사의 느낌도 다르다. 오늘 도예가 김미동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손맛으로 대변되는 ‘정성’이라 하는 것이 그저 마음을 일컫는 것인 줄 알았는데, 듣고 보니 ‘온도’요 ‘속도’인 것도 같다. 시간을 재촉하지 않고 고유의 방식을 지켜 결과물뿐 아니라 과정까지 완성하려는 고집 같은 것. 온전히 차茶를 마시는 행위에는 느림의 미학이, 섬기고 배려하는 여유의 미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내 손으로 준비하고 천천히 마시는 차는, 패스트푸드와 기성품에 익숙한 우리 현대인들의 일상에 쉼표를 찍기 안성맞춤이 아닐까.

온전한 차 한 잔
‘뜨거운’ 물을 종이컵에 담아 녹차 티백을 대충 우리고 한 모금 마시기 시작해서 그 차를 다 마실 때까지 컵에서 티백을 빼지 않으면, 혀를 데일 것 같이 뜨거운 물로 시작해 떫은맛이 강한 미지근한 차로 마무리 된다. 반면, 숙우熟盂(끓인 물을 옮겨 차를 우려내기에 적당한 온도로 식히는 식힘 그릇)에 덜어 온도를 약간 식힌 더운 물을 차 주전자에 담아 여유롭게 우리고 다 우린 차를 쪼로록 남김없이 따라내면, 차의 첫 맛과 끝 맛이 같고 다음번에 같은 차 잎을 다시 우려도 쓴맛이 나지 않는다. 전자는 내게 매우 익숙한 녹차 음용법으로 물 대신 뭐 마실 거 없나 하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음료를 마시는 방법이다. 그리고 후자는 몇 달 전 도예가 김미동 선생님의 공방을 찾았을 때 경험했던 차에 대한 느낌이다. 섬세하고 잔잔하게 남아 있던 여운이 그리워 오늘 다시 한 번 선생님을 찾아갔다. 오늘 선생님이 준비해주신 차는 ‘목련꽃차’였다.

번지는 잎의 향
선생님은 봄이 되면 집 앞의 목련을 따다가 지인들에게 대접한다고 하셨다. “사람들이 목련꽃차도 마시는지, 꽃차를 말리지 않고 마셔도 되는지 의아해하는 경우가 있어요. 몸에 해롭지 않은 꽃차는 마셔요. 목련은 알레르기 비염에 효과가 있다고 동의보감에 나온대요. 어떤 사람이 마시기에 나도 배웠어.” 말렸다가 우려 마시는 국화차, 장미차는 흔히 봤어도 목련꽃을 그것도 생화로 우리다니, 아무래도 신기했다. “근데 목련꽃차를 생 꽃으로 먹어도 되냐는 질문을 한번 되물어보면 참 재밌어요. 겨울에 나물이 안날 때 말린 나물을 먹잖아. 제철에는 생으로 먹다가 두고두고 먹으려고 말리는 건데 꽃차는 꼭 말려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기성품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편견이죠. 물론 마르면서 성분이 농축될 수는 있지만 꽃차는 생화로 마실 때 향을 좀 더 즐길 수 있어서 좋아요.” 말씀하시는 동안 선생님은 차분하고 세련된 자세로 간간이 물을 따르고, 꽃차를 우리고, 우러난 차를 잔에 따르고, 잔을 손에 잡는 법까지 일러주셨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는 표현보다 더 적절한 말이 있을까.

함께 마시고 같이 누리는 쉼
차와 차 사이에는 다식을 곁들였다. 차를 내기 전 만들어두었던 다식이다. 송화가루, 검은깨가루, 녹차가루를 꿀이나 물엿에 뭉친 뒤 틀에 꾹꾹 눌러 모양을 만들고 틀에서 빼내면 보기 좋고 맛도 좋은 다식이 만들어진다.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물었을 때의 그 달콤한 맛은 연달아 몇 개를 입에 털어 넣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었지만 내 접시에 할당된 분량은 세 개였으므로 아껴 먹기로 했다.
“요즘 차 이론을 연구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차를 마실 때 당분을 같이 섭취하면 성분이 어우러져 몸에 훨씬 좋은 상태가 된대요. 차에 다식을 곁들이는 게 맞았던 거죠.”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로 사는 것은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다.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미친 세상에서 바른 정신으로 사는 일도, 바쁜 세상에서 쉼을 누리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익숙한 성정을 거스르는 행위다. 찻물을 끓이고 식히고 우리고 따르고 마시고, 다시 식히고 우리고 따르고 마시는 과정을 온전히 경험하기 위해서는 분주함을 내려놓고 오감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과 몸은 둘이 아니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니 차를 대하는 손의 속도와 차를 따르는 소리, 차의 향을 통해 마음에는 여백과 여유가 놓인다.

김미동 선생님은 차를 대접하는 일을 두고 ‘몸짓에 마음의 중심을 담는 것’이라고 하셨고, 차를 대접받는 이는 ‘타인일 수도 있지만, 나 자신일 수도 있다’ 고 하셨다. 아, 나 자신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 잠보다, 나들이보다, 진수성찬보다, 몸과 마음의 고요함이 그리운 날에는 자신에게 차를 대접해보자. 차 주전자와 찻잔을 단정하게 놓고 오감을 열면 일상의 분주함에 묻혀 있던 몸과 마음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 글, 사진 신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