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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한페이지 단편 소설

내가 와이키키에서 찾아야 하는 것

와이키키의 백사장에서 귀에 커다란 헤드폰을 꽂고 막대기를 휘젓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처음엔 무슨 음악을 듣나 했는데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막대기 끝은 원형 판이 달려 있었고, 다른 손에는 작은 철망을 들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가 뭔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 쬐는,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과 눈부신 백사장에서 긴 팔에 긴 바지를 입고, 진지한 표정으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 밖에 없었다. 모두 단 일초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말이다. 두세 살 정도 된 딸아이와 함께 온 부부는 온통 시선이 물가에서 노는 딸 아이에게 고정되어 있다. 나풀거리는 원피스와 몸에 달라 붙는 청바지를 입은 일본인 커플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백발의 노부부는 비치 의자에 앉아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채로 책을 읽는다. 등이 그을린 청년은 자기 키보다 큰 서핑보드를 들고 바다로 뛰어든다.

나는 한 동안 이렇게 멍하니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영복도 입었고 선텐 크림도 발랐지만 바다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열두 시간 전만 하더라도, 긴 바지에 긴 팔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갑자기 뜨거운 태양 아래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눈이 부시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온다. 짐 가방 어디엔가 약이 들어 있겠지만 다시 호텔로 돌아가기 싫다.
“괜찮아요? 어디 아픈 것 같은데.”
남자가 말을 걸었다. 막대기를 들고 있던 남자다. 일부러 또박또박 알아듣기 쉬운 영어로 말한다.
“아…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요.” 나는 더듬거리면서 영어로 답했다. 남자의 턱은 수염으로 덥수룩하다. 실밥이 군데군데 보이는 모자는 아마도 한 번도 씻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들고 있는 그건 뭡니까?”
“금속 탐지기야. 모래 속에 파묻혀 있는 걸 찾아낼 수 있다고. 금속이 있는 주변에서 우우웅 하고 소리가 나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뭘 찾을 수 있지요?”
“이것 저것, 별의 별 것이 다 나온다오. 동전 같은 게 대부분이지만, 목걸이, 귀걸이, 반지도 나오지.”
“네에...” 남자는 뒤를 돌아보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샌들에 양말을 신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는 왔던 길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문득 왼쪽 손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살펴보았다. 빛이 바래긴 했어도 네 번째 손가락에 그대로 걸려 있다.
이제는 빼어 버려도 될 법 한데도 신체의 일부분처럼 손에 붙어 버린 것 같다. 와이키키 모래사장에서 이 반지를 잃어버릴 염려는 없겠지. 나는 휴대폰을 꺼낸다. 배경 화면에는 딸과 아내가 해맑게 웃고 있다. 작년에 벚꽃이 피던 공원에서 찍었던 사진이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우리 가족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 생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니까. 방과 후에 서너 개의 학원에 다니는 희진이도 다른 아이들과 비슷했을 테니까. 희진이를 낳은 직후 직장을 그만두고 살림을 하던 당신도 다른 아내들과 비슷했을 테니까. 그런데 당신은 왜 나를 떠났을까?

하마터면 당신의 전화번호에 통화버튼을 누를 뻔 했다. 조금 더, 참아야 한다. 제대로 된 모습으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전화를 해야지. 예전처럼 정신없이 중얼거리고 울면 안 된다. 감정을 이기지 못해 울거나, 화를 내도 안 된다. 당신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잘못이 있다면 더 이상 이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일 거라고 했다. 최소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듣다 보면 모든 잘못이 내 탓이라는 것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당신이 참지 못했던, 남들과 비슷한 생활이 뭐가 나쁘단 말인가? 나는 일 년 내내 생각을 해 보았지만 명확하게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화를 건다면 당신이 내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으면 좋겠다. 나는 하와이, 호놀룰루, 와이키키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깜짝 놀랐으면 좋겠다. 내가 이곳까지 당신과 희진이를 찾아올지는 생각도 못했겠지. 처제가 몰래 주소와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것도 몰랐으면 좋겠다. 내가 직장을 그만 둔 것은 알지 모르겠다. 계속 다니고 싶어도 몸이 아파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계속 몸을 혹사한다면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른다고 의사가 말했다. 아내도, 의사도, 그런 식으로 살지 말라고 한다. 진작에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배워야만 했는데, 너무 늦은 것일까? 소중한 뭔가를 드넓은 백사장에서 잃어버린 것만 같다. 그건 금속 탐지기로도 찾기가 힘들 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게 시작이겠지.

나는 양말을 벗는다. 발가락 사이로 따뜻한 모래가 느껴진다. 그제서야 나는 백사장에 앉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서진|소설가, 한페이지 단편소설(일명, 한단설 1pagestory.com) 운영자.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1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 에세이와 소설을 결합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출간. 세상의 가장 큰 의문을 풀 책을 찾아 헤매는 북원더러Book Wanderer 3nightson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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