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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햇빛 아래 노니는 삶

오성리 주민되기


내가 있는 마을은 말이 경기도지 말로만 듣던 바로 그 깡촌! 길만 건너면 충청북도인 경기도의 오지(?), 율
면이예요. 도서관도 영화관도, 심지어 공중목욕탕도 없는 그야말로 촌 중의 촌이지요. 그 중 친구들과 집을 장만한 마을은 황씨들의 집성촌인 오성리. 마을에 있는 거의 모든 집의 문패의 시작이 ‘황’이에요. 마을 사람들이 우리만 빼고 다 친인척관계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고 우리는 이 마을에 어떻게 잘 끼어들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답니다. 그리하여 집을 수리한 후 첫 번째로 벌인 일이 바로 집들이!!

돼지 잡기
일단 돼지 한 마리를 잡았어요. 시골에서 잔치라면 뺄 수 없는 아이템이라나요? 옆 마을의 이장님이
돼지잡기 선수라며 손수 나서서 도와주셨죠. 으악, 난생 처음으로 보는 돼지 잡는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어요.
앞으로 절대 돼지고기는 못 먹겠다고 생각했는데, 곧바로 구워주신 고기 한 점이 어찌나 맛있던지... 창피하게도 집들이를 하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많이도 구워먹었네요(호호호). 율면에서 가장 먼저 친해졌던 중·고등학생들에게도 S.O.S를 보냈어요. “마을 사람들 70명이 우리집에 들이닥치니까 집들이 준비를 도와줘!” 우리가 이 마을에 집을 구하기 전부터 같이 공부도 하고, 악기 연주도 하고, 건강한 요리도 배우고, 신나게 놀기도 하던 친한 친구들이라 의리 있게 한걸음에 달려와 주네요. 집도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요리와 서빙도 도 맡아서 해주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요. 서울에서도 많은 친구들이 왔어요. 몇몇 사람들은 집들이 하루 전부터 맛있는 것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는 성대한 전야제를 치러주고, 집들이 날에는 손님이 아니라 마치 집주인처럼 꼼꼼하게 일손을 거들어주네요. 아, 그래도 내가 그동안 인생 잘 살았구나 생각이 들만큼 소중한 친구들이예요.

마을 잔치 벌이기
자자, 이렇게 저렇게 집들이 준비를 마치니 마을방송이 울려 퍼집니다. “아! 아! 오
성리 이장입니다. 오늘 저녁에 서울에서 농사짓겠다고 내려온 젊은 친구들이, 에...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니, 마을주민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집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이장님이 몇 번이고 방송을 해주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부터 마을회관이랑 버스정류장에 집들이 포스터를 붙여놓아서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마을방송이라는 게 파워가 막강합니다. 방송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을 어르신들과 꼬마 아이들 너나할 것 없이 손에 집들이 선물을 하나씩 들고 꼬불꼬불한 마을길을 따라 우리집 대문으로 들어섭니다. 자리를 안내하고 말벗을 해 드리며 인사를 나누고 있노라면, 중고등학생들이 맛난 음식을 대령합니다. 한쪽에선 그동안 우리가 이 마을에 와서 한 일들, 폐가를 수리하는 과정 등이 담긴 영상이 나오고, 어디선가는 은은한 통기타 소리도 들리네요. 우리뿐 아니라 그분들께도 이런 일들은 즐거움이요, 잔치입니다.

마을 사람 되기
차린 식사와 집 구경을 얼추 끝내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마을 분들에게 재롱을 떨려고
준비한 노래를 불러드렸어요. 기타도 치고 멜로디언도 불고 모래로 만든 쉐이커도 흔들면서 우리가 만든 노래를 부르고, 감사의 인사도 전합니다. 농사를 지어서 뭐 먹고 살겠냐는 어르신들의 걱정 어린 말씀, 젊은이가 없는 마을에 이렇게 와주어서 기쁘다는 따뜻한 말씀, 고추장이나 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오라는 감사한 말씀 모두 마음으로 새기며 우리는 이 날 드디어 이 마을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이 날 집주인 할아버지께서도 서울에서 내려오셨어요. 몸이 불편하셔서 요양을 하시느라 어쩔 수 없이 이 집을 그냥 방치해두고 서울에서 살고 계시는데, 3대째 살아온 곳이라 너무 소중한 집이래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오랜만에 잘 다듬은, 그리고 시끌벅적해진 집을 보시고는 대문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계속 흐느끼시더라고요. 마음이 벅차오른 우린 할아버지와 함께 눈물을 흘렸어요. 집을 다시 수리하며 찾아낸 할아버님과 가족들의 사진과 유품도 잘 전달해드렸답니다.

정신없었지만 따뜻했던 하루였어요. 저희는 소박한 점심 한 끼를 대접했을 뿐인데 정말 값지고 따뜻한 마음들을 돌려받았답니다. 이런 게 여유로운 마을의 삶이고 더불어 사는 기쁨이라는 신고식(?)을 치른 첫 날부터 가슴 깊숙이 느꼈어요. 거대한 도시에서 작은 마을로 오길 정말 잘했구나,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이웃 간의 정이라는 것이 내게도 필요한 것이었구나... 이런 생각과 함께 마을 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황씨들의 마을 한가운데 있는 집에서 임씨인 나도 행복하게 잠들 수 있었답니다.

임나은|경기도 율면에서 농부아저씨와 거나하게 한밤 지새며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시골에서 찾아보기 힘든 단단하고 예쁜 젊은 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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