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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낯선 향기에 취하다

문화선교연구원 2008. 12. 6. 15:03
 

나는 봄에 태어났다. 그러나 봄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동안 초·중·고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매번 봄이 되면 내 의지완 상관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조금 적응했다 싶으면, 또 금세 일 년이 지나 또다시 낯선 곳에 나를 던져놔야 했다. 봄은 나와 세상의 탄생을 의미하는 꽤나 아름다운 이미지이긴 하지만, 낯설음보다 익숙함을 사랑하는 나는 봄이 알리는 ‘시작’과 ‘출발’의 의미가 별로 달갑지만은 않았다. 

나는 낯선 것들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도망치는 성향이 있다. 실제로 도망친 적도 많고, 도망치고 싶은데 그냥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간 적도 많다. 낯설음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을 때는 더도 덜도 잃을 것이 없었고, 도망쳤을 때는 평생 그와 비슷한 경험을 반복할 때마다 가위에 눌린 듯 계속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경험들을 반복하며 나이를 먹다보니 웬만한 일은 그냥 피하지 않고 사는 게 나 자신을 위한 일임을 깨달았다.

2008년, 나는 스물여섯이 되었다.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고, 나는 또다시 ‘낯설음’앞에 서있다. 얼마 전에 옮긴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올 봄엔 성(姓)을 바꿀 예정이다. 의미상으로 보면 25년을 조금 넘게 사용해왔던 내 이름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되겠지만, 나와 나의 가족들은 그 하루아침을 13년 동안 기다려왔으니 참으로 반가운 ‘낯설음’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익숙함이 낯설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아직까진 출발선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스무 살 봄에는 잊지 못할 첫사랑을 만났고, 스물여섯이 되는 올 봄에는 앞으로 평생 불리워질 새로운 이름도 갖게 된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아무래도 나는 점차 ‘봄’을, 새로운 ‘시작’을, ‘낯설음’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남주희|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건 ‘잠’, 아직도 사랑하는 건 ‘만화책’, 영원히 사랑하고 싶은 건 ‘가족’. 현재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으며 20년 후의 꿈은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고 남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