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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 속에 담긴 여름

문화선교연구원 2008. 12. 6. 16:28
이시백



밤새도록 뒤꼍에서 물소리가 조잘댄다.

며칠 비가 이어지더니, 말라붙었던 골짜기에 물이 흐른다. 골짜기라고 해 봐야 겨우 여름 장마 한철에만 잠깐 실개천이 흐를 뿐이다. 밭에서 일할 때면 장화를 신는데, 흙투성이가 된 장화를 개울가에 벗어놓곤 발도 씻고 장화의 들러붙은 진흙도 씻곤 했다. 그러다가 주둥이가 찢어진 낡은 장화를 개울가에다 그냥 벗어 두었는데 그게 눈에 띄어 우선 급한 바람에 그거라도 발에 꿰어 찼다. 장화는 한 짝이 개울가에 비스듬히 쓰러져 모래에 파묻힌 채 물에 잠겨 있었다. 맨발을 집어넣는데 무언가 발가락을 간지럽게 한다. 물결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솜털 같기도 하다. 장화를 벗어 거꾸로 들고 털자, 무언가 땅바닥에 떨어져 파득거린다. 비늘을 반짝이며 물고기 한 마리가 마당에 누워서 버둥거린다. 버들잎보다 작은 새끼 버들치였다. 그것을 가만히 손에 들고 있자니 아주 오래전, 여름의 풍경 한도막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짙푸른 초록 가운데 빨간 점 하나.


몇 살 때던가. 아마 열다섯, 아니면 열여섯. <소나기>라는 소설을 읽을 무렵이었다. 밤이면 축축한 대기 속에서 박하향이 풍기고, 별들이 요정처럼 날아다니던 시절이었다. 방학을 맞아 시골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친척 세 집이 모여 살던 마을이니 늘 보던 얼굴들뿐이었다. 온종일 메뚜기나 쫓아다니다가, 툇마루에 누워 자고 깨기를 반복하다가 낭자한 매미 소리에 잠이 깨면 그야말로 혼자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솨아솨아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솔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하고, 개울에 발목을 적시며 텀벙거리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 날도 그렇게 나른하니 심심하던 날이었다. 뭉게구름이 쪽빛 하늘에 뭉실뭉실 피어나고, 매미소리가 나른히 들려올 무렵이면 심심해 견딜 수 없다는 듯, 신작로의 미루나무는 진저리치듯 온몸을 반짝이며 떨어댔다. 원두막에 올라 미지근한 참외를 어적거리며 먹고 있자니, 온통 초록 천지의 세상에 난데없는 빨간 점 하나가 움직였다. 먼 걸음에도 그것이 여자가 입은 치마 색깔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초록을 배경으로 물방울처럼 찍힌 빨간 점 하나는 논두렁을 가로질러 우리 집 쪽으로 가고 있었다. 단숨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반쯤 남은 참외를 밭 가장이에 내던지고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먼 친척이라는 아저씨 손에 이끌리어 온 빨간 점은 얼굴이 하얗고 눈이 커다란 내 또래의 소녀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얼굴이 홍시가 되어 부엌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면서도 나는 소녀가 집에 머무는 며칠 동안 한시도 그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했는지 겨우 말문을 튼 나는 소녀를 데리고 개울로 고기를 잡으러 갔다. 삼태기로 풀숲을 뒤져 미꾸라지며, 피라미를 잡는 동안 소녀는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미루나무처럼 웃었다. 내가 잡은 물고기를 손에 쥐고는 신기한 듯 바라보는 소녀는, 집으로 가져가 고추장을 풀고 매운탕을 끓여 먹을 거라는 말에 얼굴을 곱게 찡그렸다. 그리고는 내가 벗어 놓은 고무신 한 짝에 물을 담아서는 그 안에 송사리 한 마리를 넣어 주었다. 연신 새 물을 갈아 주고, 풀잎도 넣어 햇빛도 가려주는 소녀를 나는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삼태기에는 손가락만한 미꾸라지도 많고, 심심찮게 시커먼 꾸구리나 메기도 걸려 나왔지만 나는 그때, 소녀의 작고 하얀 맨발과, 고무신 속에 담겨 있던 송사리가 지금도 머릿속에서 반짝인다.  

소녀와 보낸 여름은 유난히 짧았다. 낮이면 미루나무에 올라가 매미를 잡아다 주고, 밤이면 신작로에 멍석을 깔고 누워 보랏빛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을 바라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곤충채집 숙제를 해야 한다는 소녀에게 내가 잡아다 준 메뚜기며, 잠자리, 사슴벌레는 와이셔츠 곽에 가득 차고도 넘쳤다. 소나기가 지나간 날이면, 귀한 석유를 어른들 몰래 꺼내서 솜방망이에 묻혀 불을 댕기고, 개울로 나가 잠이 든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때, 물살이 푸릇한 개울가에서 멧비둘기라도 푸득 놀라 날아가면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내게 달라붙었다. 망할 비둘기라고 돌멩이를 던져 애꿎은 개구리들만 잠을 설치게 하면서도 나는 그때, 여름밤에 떠돌던 푸르고도 몽롱한 박하향 냄새를 잊을 수가 없다.


소녀가 떠나기 전날, 나는 개울둑에 앉아 토끼풀만 뜯어대고 있었다. 소녀가 다가와 토끼풀을 엮어 만든 모자를 머리에 얹어 주어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소 모가지에 매달린 쇠방울만 돌멩이를 집어 던져 애꿎게 울려대며 심통을 부렸다. 몇 번이나 말을 걸던 소녀는 결국 새침해져 집으로 혼자 가버렸다. 소녀가 자리를 떠난 뒤에도 나는 혼자 개울둑에 앉아 산을 내려오는 땅거미가 푸르스름하니 개울에 덮이는 걸 주변이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녀가 떠나던 날, 나는 노간주나무 울타리에 몸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 어른들이 나를 찾는 소리가 났지만 나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길을 나선 친척 아저씨가 신작로 길로 한참을 걸어갈 무렵, 산등성이 솔숲에 몸을 숨긴 채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는 어디 몸 숨길 데라고는 없이 넓은 논만 이어지는 곳에 이르러 기어코 친척의 눈에 띄고 말았다. 앞에 불려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도 나는 친척 아저씨 뒤를 한참이나 따라갔다. 이만 되었다고 들어가라는 말에 아쉽게 돌아섰지만, 멀찌감치 떨어져 읍내까지 가는 길을 몰래 따라갔다. 그때, 소녀가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소녀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했으니까. 다만 매미 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오던 초록의 천지에서 차츰 멀어져 가는 빨간 점 하나만은 지금도 내 가슴 속에 선명하게 찍혀 있다.


여름 숲이 초록 그늘로 덮여가고, 소나기라도 몇 줄기 지나가는 날이면 바짝 말랐던 집 주변의 실개천들도 제법 물소리를 낸다. 이따금 그 곁을 지나노라면 물 위에 은전처럼 반짝이며 튀어 오르는 작은 물고기들을 볼 수 있다. 나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한참동안 그 곁에서 바라보자면, 새끼 손가락만한 물고기들이 돌 밑이나 풀숲에 몸을 숨기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이 많은 물고기들이 도대체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나타났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물 냄새를 맡고 큰 개울에서 거슬러 올라오기에는 너무 멀고, 가팔랐다.

올 여름에도 장마 비는 내리고, 집 옆에는 밤새도록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실개천이 생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은빛 비늘을 반짝이는 작은 물고기들을 보며 한동안 잊고 있던 지난여름의 기억을 거슬러 오르게 된다.  내가 벗어 놓은 고무신 속에 담겨 있던 작은 물고기와, 그 싱그럽게 반짝이던 여름의 아름다운 편린들을 차마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