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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에 접어 넣은 나뭇잎 한 장

문화선교연구원 2008. 12. 6. 18:03
 

여름내 졸졸거리며 흐르던 개울물이 졸아 붙는다. 내어 놓은 거위가 멱을 감을 만큼 제법 맑은 물로 둠벙을 만들어 놓더니, 바닥에 달라붙어 흐르는 물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물을 따라 올라왔던 물고기들도 어느 결에 물줄기 따라 떠나버리고, 버들잎만한 버들치들만 철없이 오르내리다가 사람 그림자에 놀라 풀섶에 몸을 숨긴다.


나뭇잎에 시를 적던 시절

개울을 거슬러 오르니 골짜기 끝자락에 눈에 띠지도 않을 만큼 작은 샘에 다다른다. 어찌나 작은지 손바닥으로 움켜쥐면 흔적도 없이 뒤덮일 만하다. 마치 ‘어린 왕자’가 달걀을 부쳐 먹는다는 작은 화산만큼이나 작은 샘이다. 이 샘이 여름내 물소리를 내어 흐르게 하고, 온갖 물고기들을 멀리 떨어진 강줄기에 불러 올렸다는 사실이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도 샘 언저리에는 흘러나온 물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작은 웅덩이가 고여 있다. 허리를 숙이고, 고인 물 한 줌을 쥐어 본다. 금세 서늘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스며든다. 무언가 툭 하니 물 위에 떨어진다. 붉게 물든 나뭇잎 한 장이다. 뒤를 돌아다보니, 붉고 노란 잎을 매단 나무 하나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바람도 없이 물 위에 떨어진 나뭇잎은 빙글빙글 맴을 돈다. 소리도 없이 물그림자가 그윽하니 번져 나간다.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나뭇잎 한 장이 여전히 소리도 없이 떨어진다. 그 고요한 추락이라니. 그 움직임이 지극히 고요하여 세상의 소리란 소리들은 죄다 흡음기처럼 빨아들인다.

물에 얹힌 나뭇잎을 건져 드니, 바짝 마른 잎마다 붉게 물이 들어가고 있다. 느티나무 잎이다. 아, 벌써 가을인가. 붉음도 아니고, 노랑도 아닌 나뭇잎의 미묘한 색감을 들여다보자니, 오래 전의 기억이 엽서처럼 되살아난다.

식물 채집 숙제로 기억된다. 명아주며, 강아지풀 같은 한해살이 초본들을 뿌리째 뽑아서 깨끗이 씻어 두꺼운 책에 넣어 잘 말린 후에 노트에 밥풀로 붙이던 숙제였다. 식물 채집을 나갔다가 아마 보았음직하다. 붉게 물든 북나무 잎이나 느티나무 잎 몇 장을 주워서 책갈피에 끼워 두곤 했다.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책을 뒤적이다가 그 틈에 끼어 있는 나뭇잎들을 발견하곤 감회에 젖곤 했다.

사춘기 시절에도 나뭇잎들을 책갈피에 꽂아두었다. 단풍잎이며,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주워 거기에 좋아하는 시구를 적기도 했다. 단골로 적어 두었던 워즈워드의 ‘초원의 빛’이라는 시 한편이 기억에 남는다.


여기 적힌 먹빛이 희미해질수록 / 그대 사랑하는 마음 희미해진다면 / 이 먹빛이 마름하는 날 / 나는 그대를 잊을 수 있겠습니다

초원의 빛이여 /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다시는 돌려지지 않는다 해도 / 서러워 말지라 /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 오묘한 힘 찾으소서

초원의 빛이여 / 빛날 때 / 그대 영광 / 빛을 얻으소서


지금 읽어보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시편이지만, 그때는 글자 하나, 하나가 내 가슴 속에 ‘에트나의 화산’처럼 뜨겁게 새겨졌다. 곱게 물든 느티나무 잎에 깨알만한 글씨로 적어 넣은 시편들을 읽을 때면 가슴이 느티나무 잎처럼 곱게 물들어갔다. 이 시에 대한 아름다운 감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나탈리 우드’라는 청순한 여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명의 영화 ‘초원의 빛’을 보러 갔다가 교외지도 선생님에게 걸려 혼이 난 것도 이맘때로 기억된다. 내가 선생이 되어,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해 아이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 준 적이 있는데, 모두 하품을 하더니 졸기만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하품을 하며 조는 아이들이나, 이 영화를 보았다고 혼내주던 예전의 선생님들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고백하건대, 이렇게 시구를 적은 나뭇잎들은 이모나 고모 몰래 빼낸 향수를 뿌려 어느 소녀에게 전해지기도 했다. 시가 적힌 나뭇잎을 연서로 주고받던 시절은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하더냐. 직직거리는 일석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키스로 봉한 편지’나 ‘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이라는 외국 가요를 들으며 나뭇잎이나 마른 장미꽃잎에 시를 적던 시절을 상상해 보라. 지하철에 선 채로 휴대폰에 문자를 꾹꾹 눌러대는 요즘 청소년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내밀한 추억들이다.

벌써 머리가 희끗희끗 반백이 되었지만, 짙푸른 녹음이 가을볕에 말라가는 무렵이면 여전히 내 가슴 속에는 색색의 물이 드는 나뭇잎 한 장이 가슴 갈피에 끼어든다.


찬바람에 굴러다니는 매미 껍질

만지면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날 듯한 볕이 곱다. 셀로판지 같은 가을볕 아래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가 빨갛게 말라간다. 그 곁을 맴돌다 바지랑대 끝에 올라서 곤한 날개를 말리는 잠자리 날개도 유리창처럼 맑다. 이 맘 때가 되면 축축하고 음습하던 것들은 가슴을 열고 폐부 깊숙한 곳까지 내어 말린다. 흐릿하던 별들도 초롱초롱 빛나고, 섬돌 밑에서 우는 귀뚜리의 울음소리도 은방울처럼 낭아하다. 등불 아래 읽는 책의 활자들도 새록새록 가슴에 스며든다.

떠나는 여름을 붙들고 개울가의 미루나무에 달라붙어 맹렬히 울어대던 매미들의 울음도 이맘때가 되면 바람 소리를 낸다. 칠년을 굼벵이로 땅속에서 지내다 지상에 올라와 날개를 달고는 불과 일주일밖에 살지 못한다는 매미의 울음은 아침마다 피부로 느껴지는 찬바람처럼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허전하니 비어가는 숲을 걷다 보면, 찬바람에 굴러다니는 매미 껍질이 눈에 띤다. 알맹이는 한 점도 없이 거미줄처럼 가벼운 껍질만 남겨 놓았다. 어느 시인의 말로는, 울음소리로 죄다 날아가고 껍질만 남겼다지만, 그 빈 껍질의 무게만큼이나 이 세상이 허망하다. 세상의 수명을 다하고 하늘로 돌아갈 때, 우리가 남겨 놓을 세상 것들과 육신의 온갖 욕망들도 찬바람에 굴러다니는 매미 껍질과 같을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말라가며 짐을 챙기는 가을이다. 집착과 탐욕의 열기를 식혀서, 하늘 아래 고개 숙이게 하는 계절이다. 귀에 익은 릴케의 시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가을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에게 그것의 끝이 있음을 깨우치며, 유한한 삶의 소중함과 덧없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전도서의 성구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 계절….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만큼 가을을 잘 말해주는 성구가 있을까. 내 삶도 나뭇잎이나 매미 껍질처럼 말라갈 것인데, 그 위에 어떤 빛깔로 물들일 것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