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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추의 커피 이야기 4ㅣ커피, 정직과의 직면

문화선교연구원 2008. 12. 6. 18:09
 

나는 몰래 몰래 손님들을 훔쳐본다. 어떻게 커피를 마시는지 설렘으로 두려움으로 몇 번의 눈빛을 보낸다. 가게 문을 나서는 뒷모습과 함께 손님이 비워낸 커피 잔까지. 한낱 음료에 그 정도로 신경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내게 ‘정직과의 직면’, 그 자체이다.


자신과의 일치점에서 커피를 만나다

커피를 뽑는다는 것은 뜨거운 물속에서 변화되는 모습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과의 일치점에서 만났을 때 훌륭한 커피가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잘 뽑아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 욕심이다. 게다가 커피는 뽑는 사람의 기분이나 그 사람의 성격까지 녹아내리는 예민함을 가지고 있기에 가장 자신다운 커피를 뽑는 것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커피를 뽑는다고 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뽑는다’가 아닌 ‘맛을 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커피와 관계된 모든 기쁨의 시작이다. 따라서 커피의 맛도, 그 맛이 선사하는 기쁨도 모르고서 커피를 뽑는다는 것은 참으로 공허한 일이다.


커피의 다양한 얼굴

요즈음에는 인터넷이나 여러 미디어를 통해 손쉽고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앞선 지식이 실제로 맛내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 모방을 통해 창조를 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원두의 사용량이나 뽑는 방식 등을 똑같게 하는 것은 체인점의 매뉴얼과 같다.

커피는 ‘커피’라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주 약간의 미세한 변화에도 커피가 드러내는 모양새는 매우 달라진다. 즉, 결정적인 것은 없고 반사적인 것이 커피가 가진 개성이다.


커피는 사람이다

프로는 나름의 감각과 축적된 경험으로 그 가게의 스타일을 확립해야 한다. 커피가게라는 것은 맛과 손님과의 진검승부이다. 손님이 “아, 좀 더 마시고 싶다.”라고 아쉬움이 남을 즈음에 커피는 다 마셔진다. 마신 후에는 희미한 단맛의 여운이 가득 남는다. 여운을 남기는 커피를 만드는 것이 프로의 임무이다.

‘맛있는 커피를 마신다’와 ‘맛있게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다르다. 다만 ‘마신다’라는 것에 큰 행복과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마신다는 기쁨은 사람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맛없는 커피를 만나게 되면 화가 난다.

정말로 맛을 기대하고 이해하는 손님은 본래 과묵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안심(安心)’이다. 커피는 그 안심이 있을 때야말로 ‘진상(眞相)’이 변하지 않는다. 뽑는 사람과 마시는 사람 사이의 안심이 참 커피의 본래 맛을 창조하는 것이다. 커피는 순수이고, 사람이다. 인종과 국경을 떠난 세계인의 커피가 될 수 있었던 길은 여기에 있다.

오늘도 나는 커피를 통해 내 정직한 자아와 만난다. 나의 즐거운 훔쳐보기는 계속 이어진다.


박이추|강릉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 자리한 ‘카페 보헤미안’의 대표. 우리나라 커피 1세대로 꼽히며, 자가 로스팅의 대가인 ‘3박(朴)1서(徐)’중의 한 명이다. “몸과 마음과 커피가 하나가 될 때 맛있는 커피가 된다.”, “커피가 맛이 없다면 그건 사람의 죄지 커피의 죄가 아니다”라며, 커피 속에서 인생의 진실을 찾는 커피 철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