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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목사의 사람풍경 5ㅣ비장한 외출

문화선교연구원 2008. 12. 7. 19:58


키가 작고 아담하며 깔끔해 보이는 노인이 옷매무새와 치마를 잘 사리며 조심스레 의자에 앉는 모습이 정갈스럽기가 여간이 아니었다. 이 노인의 머리칼은 하얀 모시 같은 백발이어서 햇빛을 받는 부분에서는 하얀 빛을 은은히 반사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그렇게 주름살이 많지 않지만 피부가 노인답지 않게 고운 편이었다. 작은 말 소리도 잘 듣고 안경을 쓰지 않고도 성경을 잘 읽을 수 있다며 가만가만 말을 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어떻게 왔느냐, 누구냐 묻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고 편히 쉬다가 가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인삼차를 끓여 공손히 대접했다. 금방 자리를 뜰 것 같이 보이지 않았다. 교회의 직분을 물었더니 오명진 권사라고 했다.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오다보니 여기까지 왔고 나를 만나보니 오랜 구면 같은 친지와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긴장감을 다소 푸는 것같이 보였다.


묻지도 않는 말을 불쑥 꺼냈다. 오늘 아침에 며느리가 내뱉다시피 한 말이 어찌나 귀에 거슬렸는지 속이 매우 상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랬느냐고 했더니 별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어머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오래 오래 사시라는 인사를 받으니 참 좋으시겠수.” 며느리가 했다는 말을 하고는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또다시 말을 이었다. “하기야 질긴 목숨 너무 오래 살긴 살았지.”

혼잣말을 하듯이 맥없는 말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명진 권사와 나는 응접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인삼차를 마셨다. 어느새 낯선 긴장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처음 볼 때부터 오 권사의 나이가 궁금했다. “권사님, 연세가 어떻게 되셨나요? 여자분께 나이를 묻는 것은 좀 실례가 되는 일이지만요, 용서하세요.” 소녀 같은 앳된 모습과 다소 애교 섞인 어조로 웃으면서 굵은 주름살을 드러냈다. “목사님도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남들은 내 나이를 칠십대 중반으로 대게 짐작하지요. 올해 여든 다섯이라오.” “그러시면 갑자(甲子)년 쥐띠시겠네요. 그러시지요?” “쥐띠가 맞아요.”

아직도 오 권사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있는 것 같아서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었다. “권사님, 오늘 아침에 있었던 속상한 일들은 먼지를 털듯이 훌훌 털어버리세요.” 내가 위로한답시고 한 말을 듣고는 오 권사는 한참동안 눈을 꼭 감았다가 뜨더니 약간 떨리는 듯한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는 연천이니 목사님께 털어놓아도 말이 날 리 없겠지요. 다 들으시고 늙은이 망령 났다고 흉보지 마세요.”


맏며느리와 38년을 한결같이 한 지붕 아래 살면서 남에게 별로 흉을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맏아들의 나이는 65세이고 맏며느리는 62세라고 했다. 24세에 시집을 와서 38년간 시집살이를 한 것이다. 맏며느리는 아들이 결혼을 하자마자 곧바로 살림을 내주었다고 했다. 자기가 시집살이 38년을 했으면 됐지 며느리까지 시집살이를 시킬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증손자의 나이가 벌써 다섯 살이 되었다. 남들은 맏며느리가 아주 얌전한 요조숙녀라고 말하지만 오 권사는 그녀의 속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다며, 고개를 가로젓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맏아들은 사람 좋기가 그만이라고 다들 입을 모아 말한다는 것이었다. 맏아들 말고는 모두 기독교인이고 작은 아들은 장로이고 작은 며느리는 권사라고 했다. 장손녀는 서른일곱 살 인데 유치원 원장이고 오 권사가 나가는 교회 성가대의 지휘자라고 자랑했다. 아직까지도 시집을 안가고 이제는 독신으로 살겠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 권사는 장손녀 사위를 보는 것이 소원이라서 새벽마다 그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하고 있단다. 눈빛을 보니 아마도 심상치 않은 깊은 이야기를 끌러놓을 모양이었다.


오명진 권사는 교회 창립 때부터 다닌 개척교인이라고 했다. 몇 달 전에 창립 38주년 행사를 푸짐하게 했다며 혹시 여기올 때 비가 올지 몰라서 우산을 지팡이 겸해서 가지고 왔는데 그 우산이 창립기념예배 기념품이라고 했다. 오 권사는 30년 넘게 맨 앞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며느리는 맨 뒷자리에 지정석을 잡다시피 하고 있으며 만년집사라는 별명을 얻은 교인이다. 어느 날 담임목사의 심방을 받았을 때 담임목사는 맏며느리보고 오 권사 옆자리에서 금자리 은혜를 함께 받으라며 강력하게 권면을 하였더니 맏며느리는 빙긋빙긋 웃으며 변명을 하였단다. “남편 점심 차려주려면 일찍 나와야 하기 때문에 곤란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맏아들이 와서 한다는 말이 “어머니, 한두 살 드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눈치도 없어요. 애미가 어머니와 한 교회를 다니는 것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아세요. 목사라는 양반이 남의 집에 와서 기껏 한다는 것이 집안 분란이나 일으키고 갔단 말입니까? 애미한테 그런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 줄 아세요.” 하며 속사포처럼 쏟아 붇고 휑하니 나가더라는 것이다. 오 권사는 아닌 밤에 홍두깨로 맞은 말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그 날 이후 며칠간 뜬눈으로 새울 때 남편 생각이 그렇게 많이 날 수가 없었다. 병간호 10여 년간 받고 떠난 남편이 죽지 않고 있었어도 아들 며느리한테 그런 꼴은 안 당했을 것이라며 분노에 차있었다. 괘씸한 생각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들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첫인상과는 전혀 다르게 오 권사는 다소 격한 어조로 말했다. “목사님. 맨 앞자리에서 금자리 은혜를 받는다고 앉아있었을 때 내 뒤통수가 며느리의 눈총을 얼마나 먹었을까요.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요.”


맏아들의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후 며느리의 눈에 잘 안 보이는 데로 자리를 잡고 예배를 드리려고 하니 예배를 드려도 드린 것 같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들과 며느리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고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며느리가 좋아하는 과일을 장만해서 저녁상을 차리는 깜짝쇼를 했단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는 숟갈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말더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아들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명동에 가서 최고로 비싼 구두를 사서 선물을 했는데 어느 날 그 구두가 찢겨진 채로 쓰레기봉투에 들어있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아들 친구 부인한테 우연히 들은 이야기인데 술을 먹고 친구들이 있는데서 이 구두가 속을 썩인다면서 칼로 그었다는 것이다. 오 권사는 그 소리를 듣고는 더 이상 집에 있을 수 없어서 비장한 외출을 결심하고 여기로 왔다는 것이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여기에다 살 집을 구해서 이 교회로 다니면 해결이 될 것 같다면서. 시어머니 없이 사는 자유와 행복을 전혀 누리지 못한 맏며느리에게 미안함을 처음으로 느꼈다고 했다. 알고 보면 온 식구가 다 좋은 사람들인데, 안타까움이 깊어진다.


윤여일ㅣ시인 목사. 2003년에 문예비전에서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인생에 대한 겸허한 성찰과 자연에 대한 섬세한 사랑이 담긴 <은행나무거목옆에서서>라는 시집을 작년 가을에 냈고, 현재 연천에 있는 상리감리교회를 담임목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