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의 초대 ㅣ 복합문화공간 King 크링
오래 전 ‘네모의 꿈’ 이란 노래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 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몰라.”
동화 같은 가사에 감전되어 흥얼거리던 그때는 몰랐다. 네모의 꿈이 내 꿈이 될 줄은. 둥글게 사는 일이 마음처럼 쉽지 않을 땐, 마음이 둥그런 누군가에게 와락 안겨 펑펑 울어버렸으면 좋겠다. 동글동글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보며, 그래도 내 속에 둥근 것이 남아있구나, 위로할 수 있게.
제공:크링
울림,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기
서울 강남의 대치동 사거리, 그 한복판에 이런 네모의 꿈을 꾸다 지친 사람들을 위로할만한 공간이 탄생했다. 네덜란드어로 원(circle)을 뜻하는 ‘크링(kring)’이다. 각진 빌딩들 사이에 둥근 곡선이 유난히 눈에 띄어 더욱 독특한 크링은 금호건설에서 공사를 시작해 작년에 개관하게 된 복합문화공간이다. ‘원’은 ‘소통의 자유’를 의미하며 문화, 예술, 감성을 한데 어우르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건물의 외관만 본다면, 지구 위에 불시착한 우주선이 떠오른다. 둥근 표면에 시선을 잇다 보면 군데군데 분화구처럼 뚫린 또 다른 원이 보인다. 우주여행을 하다가 부딪친 운석들의 자국 아닐까? 그래도 지구엔 맘이 둥그런 생명체들이 아직 많아 아예 정착해 버렸나보다. 이 딱딱한 건물이 자꾸만 말랑말랑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더 작게 더 작게, 안으로 안으로 좁혀가는 원들, 반대로 밖으로 밖으로 퍼져 서로 겹쳐진 원들. 그 모든 것들이 한데 결합해 하나를 이룬 기이한 건물이다. 입구를 지나 뒤를 돌아보니, 전체로 번지는 둥근 선들이 잔잔한 호수 위에 돌멩이를 하나 던질 때, 번져가는 물결의 파장 같다. 우주선의 낯설음보다는 물방울 속으로 들어온 듯한 포근함이 인다. 그 경계를 뚫고 들어올 때의 울렁거림은, 공간 전체의 울림이 되나보다.
1층의 Artrium과 Art square는 온통 순백의 타일로 꾸며져 있다. 다른 색과 함께 있어도 좋고, 또 없으면 없는 채로 더욱 좋은 색 하양. 순백이야말로 참 이기적이고도 매력적인 색깔 아닌가. 회색빛 먼지들을 껴안고 등장한 사람들을 정화하듯, 순간 눈이 부신다. 부드러운 햇살이 스며들 수 있도록 설계한 배려다. 차가운 느낌의 타일과 따뜻함을 상징하는 붉은 조형물들의 조화, 비디오 아트를 통해 번지는 색과 빛의 향연들까지. 새로운 감성이 말을 걸어올 때 느끼는 흐뭇함이 번진다. 물방울 속으로 들어온 이상, 물처럼 흘러 공간 구석구석에 스미는 수밖에.
2층 라운지
2층 라운지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교감, 즉 소통이다. 소통의 통로는 공중을 가로지르는 원통형 브릿지들로 표현된다. 총 4층 건물 이곳은 1층과 2층이 높은 천장으로 연결되어 있고, 3층과 4층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데, 어디를 가든지 그 거대하고 요상한 다리를 볼 수 있다. 유리로 되어 있거나 구멍이 뚫려 있어 연결하고자, 비춰주는 거울이 되고자 하는 의미가 제대로 드러난다. 공간이 가진 착한 욕심이다.
쇼케이스로 활용 가능한 2층의 빈티지홀이나 크링홀은 패션쇼, 런칭쇼 및 각종 전시, 강연회를 열수 있도록 대관이 가능하다. 지난 <크링 개관전>을 시작으로 <영국현대미술전>, <Creative Art: 아프리카 미술을 만나다 전>등 크고 작은 기획전들이 열렸다. 그렇다고 크링을 ‘갤러리’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갤러리화 되는 것을 지양하고 있다. 그 노력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숨겨진 공간에 자리 잡은 작품들이다. 비어 있는 벽면이나 공간을 활용해 마치 인테리어처럼 작품을 숨겨 놓았다. 이 외에도 1층의 컨퍼런스룸은 비즈니스를 위한 장소로 마련되어 있다. 각 방마다 색깔을 입혀 더욱 자유롭고 창조적인 분위기에서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공간 속에선 나뉜 것처럼 보였던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섞여 새로운 것이 탄생될 것만 같다. 그렇게 둥글게 손을 맞잡게 되겠지. 진정한 교감, 소통은 내보이지 않았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바로 숨은 조화다. 그래서일까, 크링은 건물 안과 밖 어디에도 그회사명을 찾아 볼 수 없다. 안내 데스크가 금호 건설의 CI를 흉내 낸‘ V' 모양으로 수줍게 놓여있는 것밖엔. 이것도 2층에 올라가서야 아래를 내려다보며 발견할 수 있어, 피식 웃음이 터진다. 숨겨놨기에 가능했던 발견. 이 지점이 바로 여유이고, 위트이며, 조화일게다.
① 2층 크링홀 ② 2층 라운지 ③ 2층 숨은 작품들
나눔, 완성된 소통은 흐른다
고 하니, 엄선한 작품들을 눈여겨봐도 좋을 듯. 무엇보다 관람객이 기부한 입장료 전액은 문화 예술계 발전을 위해 쓰여 나눔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2층 ‘테마카페’에서는 자율기부를 통해 모금된 돈으로 ‘소아암협회’와 ‘홀트아동복지회’에 전액 기부하고 있다. 이 카페는 바리스타 안명규 씨의 ‘커피명가’의 커피 맛을 그대로 맛 볼 수 있어 호응이 높다. 이 외에도 4층 스카이가든은 야외 공간으로 꾸며 하늘을 산책하는 기분을 만끽하게 만들었다. 주로 작은 음악회나 개인 파티들이 많이 열려 다양한 이벤트를 경험할 수 있다고. 영화 한편 보고, 커피 한잔 마시고 올라온 곳에서 하늘을 한번 올려 다 봤을 때, 행복하다 느낀다면 그건 분명 나눔 덕분이리라. 이내 ‘빵집아줌마, 수퍼집 아줌마, 403호 아줌마, 304호 아줌마’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 앞에 선다. 뽀글뽀글 머리에 둥그런 얼굴을 가진 익숙한 얼굴들 앞에서 입이 쭉 찢어진다. 아직도 타인과의 소통이 가장 어렵다는 멀리 있는 친구에게 쪽지를 쓴다. ‘나는 늘 그랬지만 지금도 그래. 대한민국 아줌마들처럼만 열심히 산다면 참 좋겠어. 살아있길!’ 끄적인 종이를 접고, 또 접는다. 물방울 속에 잠기니 참 좋건만, 이젠 흘러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