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나이가 좋다 ㅣ 딴 짓 하는 삶, 적령기는 없다!
글 김주원 | 사진 정미희
가업을 이어받는다는 것
강선아 씨는 ‘강대인 생명의 쌀’ 등 유기농 농산물을 직접 생산하고 판매하는 강대인 씨의 맏딸이다. 강대인, 전양순 부부는 30년 세월 동안 각종 시행착오를 거친 뒤 지금은 ‘발도르프 교육학’의 ‘생명역동농법’에 따라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다. 강선아씨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도왔고 그 땐 아버지가 남들처럼 평범한 회사원이었으면 하고 바랐단다. 저녁이든 주말이든 자잘한 일거리를 곧잘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땐 마냥 놀고만 싶었
죠(웃음). 중학생이 되니까 왜 우리 집에서 농사를 짓는지 조금 알겠더라고요. 학교도 고등학교는 순천에서 다니고 대학은 수원에서 다녔어요. 농업에 대한 인식이 바로잡힌 건 벤처농업대학
다닐 때였죠. 그 때 가서야 우리 농업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요.” 그녀는 아버지가 50일 동안 단식기도 하다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업을 잠깐 돕는다는게 한 달이 세 달이 되고 세 달이 1년이 되면서 아예 가업을 정식으로 잇는 모양새가 되었다. “지금도 엄마 아빠는 너 제대로 할 줄 모르면 더 나은 사람에게 물려줄 거라고 말씀하시곤 해요.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란 거죠. 아빠 쓰러지고 나서 집에서 일 도울 때는 엄마랑 많이 다투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했다는 강선아 씨. 집안일을 돕기 위해 수원에서 벌교로 막 내려갔을 때만 해도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스트레스였단다. 그러나 천성이 느긋해 금방 익숙해졌다고. “농사를 짓다보니 농사 말고도 배워야할 것이 너무 많다는 걸 알았어요. 저희 집이 국내에서 유기농을 거의 처음 시작하다 보니까 일본에서 온 농업 관계자들도 자주 오고 박람회 같은 데도 나가다 보니 일어랑 영어도 잘 해야겠더라고요. 오히려 여기서 공부할 게 더 늘어가는 것 같아요.” 그녀는 농번기엔 부지런히 농사를 돕고, 겨울철 농한기에는 자체 교육원의 커리큘럼을 관리한다거나 각종서류 업무와 씨름하는 등 웬만한 도시 사람들만큼이나 바쁘다. 그런 강선아 씨도 만약 서울이나 다른 대도시에 머물렀다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서울에서 살았다면 잘 못 살았을 것 같아요. 공기도 안 좋고. 처음에 친구들한테 농사짓는거 괜찮다, 나중에 괜찮은 농사꾼한테 시집가라 그래도 좀 불편해하더라고요. 그런데 다들 사는 게 힘들다 보니까 조금씩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아요. 농사지으면 어렵긴 해도 돈도 벌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도시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려면 흙에 대한 부담감을 덜 수 있어야 해요. 농사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젊은 여성 귀농인의 꿈
한편으로는 20대로서, 또 여성으로서 지역의 보수적인 문화가 불편할 때도 있었을 게다. “ 제가 또래보다 훨씬 일찍 농사를 짓고 있고 또 여자가 하고 있으니까 마을 어른들이 절 기특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럴 때 듣는 얘기가 네가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어른들에겐 농사는 남자가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으니까요. 예전엔 속상했는데 지금은 ‘여자니까 하는 거예요’하고 웃어넘겨요.” 그녀의 20대는 농사를 시작하기 전과 후로 나뉜단다. 10대로 돌아 간다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더 보탬이 되었으면 싶고, 앞으로 10년 후에는 친환경농업전도사 일을 계속하면서 자기 이름 자 걸린 쌀도 내고 싶고, 지역 농민들에게 문화혜택도 주고 싶다는 강선아 씨. 그녀에게 20대에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을 부탁했다. “나이랑 상관없이 보통 내려오시면 몸이 힘들어서 오래 못 하는 경우가 많아요. 몸이 힘든 건 한 순간이에요. 하지만 일관된 마음 하나 단단히 잡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불가능하지 않아요. 제안서를 쓰고 적절한 기준에 맞으면 2억 원까지 지원금도 받을 수 있어요. 벤처농업대학에서 배우는건 대부분 국비지원 되고요.”
강선아 씨는 비록 도시에 사는 또래들처럼 취업전쟁에서 경쟁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기농 농업에도 긴장감이 도시 못지않다고 한다. 친환경은 기본이고, 제품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차별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20대 귀농인’이라는 말이 어색하다는 강선아 씨. “이것도 일종의 취직이에요. 남보다 조금 더 도드라져 보일 뿐이죠. 찾아오는 분들은 제게 고생한다고 하시지만, 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는 스펙 경쟁이 20대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말 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