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2010 03-04 익숙한 것과의 결별

익숙한 것과의 결별 ㅣ 편리함에 중독된 삶에서 내려, 걸어라_자가용과 결별

문화선교연구원 2010. 4. 6. 10:30

그림 이승리

자가용을 운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할 기회가 매우 드물어졌다. 걷기의 미학이니, 느림의 미학이니 하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는 요즈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하지만, 생각에만 그칠 뿐 곧 편리함에 밀려 나곤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 많이 걸어야 건강해진다는 소리도, 들을 때만 솔깃할 뿐 편리함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나에게 ‘ 자가용과 결별’을 체험해볼 기회가 왔다. 게다가,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끊기까지 덤으로. 2주라는 길고 긴 고행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자가용을 탈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
중독처럼 굳어진 자가용 타기를 끊는다는 것,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뭐가 그리 어렵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지만, 쉽게 해내기에 나의 몸은 너무 오랫동안 자동차에 습관화가 되어 있었다. 차를 눈앞에 그냥 두고 출근해야 하는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로부터 매일 그냥 포기할까 망설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나이기에 ‘자가용과 결별’이 주는 일상의 변화는 참으로 엄청났다. 면목동에서 종로 5가까지 출근하는 길,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추운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그나마 종점에 가까운 지역이라 앉을 수 있었다.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읽고 싶었던 책이 있어서 가방에 넣고 다녔는데, 운전을 하지 않으니 읽을 수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오늘 이 아침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MP3를 듣는 대학생, 꾸벅꾸벅 조는 직장 초년생, 꿋꿋하게 삶의 거대함을 헤쳐 나가는 듯 보이는 중년의 남성, 아침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지쳐 보이는 얼굴의 아주머니, 버스 기사분의 취향에 따라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 트로트가요 소리, 또는 잠시 흐르는 정적…. 자가용을 가지고 출근할 때 느끼지 못했던 삶의 갖가지 모양과 소리가 바쁜 아침의 호흡을 한 번 더 깊게 해주었다.

‘걷기’가 주는 삶의 여유
사무실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좋아하는 원두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하여 차가운 바람결이지만 언 손을 녹이며, 입안으로 따스하게 넘어가는 커피 향을 느끼며 걸어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아, 이게 걷기의 미학인가. 자가용은 빠르고 편하고 효율적인 대신, 우리 앞을 스쳐 가는 작은 순간순간들을 놓치게 한다. 느리고 불편하고 돌아가는 것 같아도, 걷는다는 것은 바쁘게만 돌아가는 일상의 틀에 잠시나마 여유를 불어 넣었다.
첫 날은 사무실 건물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별 생각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러다 깜짝 놀라 다시 내린다. ‘아, 걸어 올라가야지.’ 편안함을 뒤로하고, 4층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숨을 몰아쉬며, 헉헉거리며 사무실 문을 들어서는 나를 보며, 다들 의아하게 쳐다본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은 흘러가고 무언가를 참는다는 것이 이렇게 쉽지 않은 것인가, 싶으면서도 이를 통한 ‘걷기’가 나도 모르게 내 일상을 조금씩 바뀌게 하고 있었다. 이를 체험하는 2주간 동안 나의 관심은 신학도 아니고, 교육도 아니고, 먹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가용 끊기’와 ‘걷기’였으니 말이다.

작은 불편함도 견디지 못하는 문화
사순절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며, 그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조롱받고, 고통받았던 시간들을 돌아보는 동시에, 지금의 우리의 편안하고 안일한 삶을 점검하고 절제하는 기간이라면, 나에게 있어 ‘자가용 끊기’는 말 그대로, 미리 경험한 사순절 고난 묵상과 같았다. 아주 작은 일상의 불편함도 견디기 힘들어 할 만큼, 빠름과 편리함에 길들여진 내 삶의 문화를 여과시켜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는 편안함에 중독되어 있던 나에게 절제의 정신, 걷기와 느림의 미학을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조금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처절한 고통 속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마침내 부활하셔서 승리자가 되신 감사의 부활절을 맞는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분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기억하며, 우리의 일상에서 해볼 수 있는 절제의 시간을 갖는 것은 해마다 맞이하는 사순절이 더 이상 통과의례가 아닌 귀중한 신앙의 결을 만들어가는 기회가 될 것이다.

2주간의 ‘자가용과 결별’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자가용을 갖고 출근한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지하 1층까지 내려오려면 오래 걸리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계단을 오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자가용과의 결별’의 체험을 통해 내 삶의 오랜 습관을 나도 모르게 이제 깨어 가고 있는 것일까. 글 손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