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2010 07-08 잘 놀고 계십니까

잘 놀고 계십니까 1│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

문화선교연구원 2010. 7. 19. 10:30
한국어에서 ‘놀다’는 ‘play’이상의 뜻을 내포한다. “자네 요즘 뭐 하나?” “예, 그냥 놀고 있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 것, 즉 실업 상태를
뜻한다. ‘기계를 놀린다’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 의미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이 어줍지 않은 행동을 하면 ‘놀고 있네’라고 비아냥거린다. 그 외에도 ‘놀아났다’, ‘놀려 먹는다’, ‘노리개감’, ‘노는 애들’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놀다’의 쓰임새나 그 파생어들은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정갈한 수행을 강조하는 유교 문화에서 놀이가 적극적으로 자리매김 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근면한 노동이 요청되는 산업화 과정에서 놀이는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러나 인간에게 놀이는 근원적인 삶의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놀이가 뭐기에?


놀이, 문화의 시작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라는 화란의 사학자가 쓴 <호모 루덴스>에 따르면 인간의 문화는 그 자체가 놀이에서 연유하며, 스포츠나 예술뿐만 아니라 정치, 법률, 전쟁, 학문까지도 그러한 범주에서 파악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놀이의 본질은 순전히 재미를 추구하는 자발적 행위다. 따라서 타인의 강제에 의해서 또는 물질적인 이득을 노리고 하는 것은 놀이가 될 수 없다. 또한 놀이는 일상에서 일정하게 격리된 시공간 속에서 영위된다. 그래서 그 나름의 자기 완결적인 논리와 규칙에 의해 지배된다. 인간은 세상을 바라보는 질서를 놀이적인 충동으로 구성했고, 사회라는 공동생활 자체가 놀이 형식을 가지고 있다. 신화와 의례는 그러한 속성을 함축적으로 집약하는 언어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놀이를 통해 인간은 주어진 현실의 모호함과 혼란스러움을 넘어 더욱 명료하고 절대적이며 완전한 것을 지향하는데, 바로 거기에서 삶의 원동력이 발현된다. 유희에 완전히 몰입해 있는 어린아이의 무아지경이나 장엄한 미사를 올리면서 깊은 신비감에 사로잡혀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통해 그러한 에너지의 실체를 확인할수 있다. 놀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탁월한 상상력과 선한 의지가 발휘되는 영역으로서 문화의 발전을 추진해온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위징아는 현대 문명이 그러한 놀이적 요소를 상실하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스포츠의 경우 점점 상업화로 치달으면서 선수들은 지극히 미세한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그 피를 말리는 긴장감은 자연스럽고 느긋한 놀이의 기쁨과 거리가 멀다. 예술의 경우 몇몇 예술가들의 독점물로 변하면서 개인적인 재능 내지 취향으로 간주되었고,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예술가들을 동경하면서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창조적인 충동을 왜곡한다. 예술은 어떤 정서와 메시지가 생성되고 공유되는 공동체적인 기반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고립되고 만다.

‘나’를 깨우는 창조적 놀이

하위징아의 책이 문화 현상에 관한 저술인데도 60년 이상의 세월을 건너 뛰어 여전히 읽히고 있는 것은 저자의 치밀한 문헌 연구와 예리한 통찰력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특히 오늘 한국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크다 하겠다. 미디어와 도시 공간에는 온갖 놀이적인 이미지와 소프트웨어들이 넘쳐나는데 우리의 생활 세계는 왜 이렇게 무료와 권태에 찌들어 있을까? 크고 작은 이벤트가 끊임없이 잇따르는데 왜 우리는 축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 무엇인가 우리의 놀이 충동을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명분으로 무장한 권위주의의 억압, 맹목적으로 자극을 남발하는 상업주의, 한편으로는 허세로 군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눈치를 보는 속물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놀이는 현재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면서 존재에 온전히 몰입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노동에 몸을 혹사하고, 아이들은 장래의 성공과 안락을 위해 지금 누려야 할 생활의 즐거을 박탈당하고 있다. ‘놀토’라는 것이 격주로 주어지지만 놀이를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다. 일하는 기계, 공부하는 기계로 지친 심신을 위로하는 것은 소비적문화 형태와 자극적인 미디어다. 쾌락, 도박, 인터넷 게임 같은 놀이는 끊임없이 자아를 탕진하게 하면서 내면을 허약하게 만들뿐이다. 그러한 도피가 만연하는 속에서 문화는 고갈된다.
놀이를 통해 창조적인 잠재력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학습’이 수반되어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말처럼 안목이 없이는 심오한 희열을 맛볼 수 없다. 그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배우고 닦아야 한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스포츠같은 것도 제대로 배우고 나면 훨씬 즐거움이 커진다. 수련의 과정을 거친 만큼 탁월함을 획득하고, 그 발현을 통해 뿌듯한 몰입을 만끽할 수 있다. 오늘 놀이가 그토록 요란하면서도 공허한 까닭은 그러한 자기 연마의 땀을 흘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는 늘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겉멋으로만 맴돈다.

문화는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시나리오다. 놀이는 자유로운 감각으로 현실을 조감하면서 또 다른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환상 체험이다. 그 경지에서 우리는 지리멸렬한 일상의 번뇌를 뛰어넘을 수 있고, 드높고 드넓은 경지에서 타인을 재발견할 수 있다. 이해관계와 우열 비교의 강박에서 잠시 풀려난 마음들이 공적 행복감을 빚어내며 탁월한 존재로고양된다. 그 상상력에는 정신과 물질과 시간의 잉여가 필요하다. 결국 놀이 정신의 회복은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 아닐까.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풍부한 생명 에너지를 자각하고 그것을 문화적인 양식으로 객관화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한결 멋지게 자라날 것이다.



김찬호|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를 취득하고 대학에서 문화인류학과 교육학을 가르치고 있다. 학교 바깥에서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가족 관계, 디자인, 청소년 교육, 부모 교육, 마을 만들기, 창의성, 한국문화론 등에 대해 강연을 하고 있다. 저서로 <사회를 보는 논리>, <도시는 미디어다>, <문화의 발견: KTX에서찜질방까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