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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3 07-08 산으로, 갈까?

산으로, 갈까? 5│예측불허, 나 홀로 산행기 - ‘백제의 미소길’을 걷다


산이 다 똑같지, 별거 있나
취재라는 명분으로 떠난 나 홀로 산행. 이별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아 머리가 복잡하던 나는, 이참에 가야산에 모든 괴로움을 던지고 오리라 결심하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산을 등반해 본 경험은 별로 없지만, 깡 시골 태생인 나는 산 타는 것을 그리 대단한 일로 여긴 적이 없었다. 산이야 다 똑같이 푸르고, 험하기야 에베레스트 등반이 아니고서야 다 비슷할 테지. 게다가 동네 뒷산만 올라도 히말라야 등반하는 것처럼 쫄쫄이 등산복에 각종 장비를 풀세트로 챙겨가는 등산객을 보며 혀를 찼던 나이기에, 짐은 간단했다.
목적지는 가야산 자락에 있는 ‘백제의 미소길’. 가야산은 충남 예산군과 서산시, 당진군 등 3개 군에 걸쳐 있는데, 백제의 미소길은 그 중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를 연결하여 생태탐방로로 조성 중인 숲길이다. 올 7월에 개통할 예정이라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아직 개통 전인 길을 걷는다는 게 조금은 설렜다. 발자국 하나 없는 새하얀 눈밭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는 느낌이랄까.


산이 품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초보 산행자의 패기로 씩씩하게 오르기 시작한 산행. 가야산 들머리인 상가리에서부터 용현리까지 총 6.54km의 숲길을 걸으며, 산은 그저 산일 뿐이라 여겼던 내 생각이 짧았음을 천천히 깨달았다.
‘백제의 미소길’은 가야산의 생태를 체험하는 학습장이자 살아있는 식물도감이었다. 땅을 향해 꽃을 둥그렇게 오므린, 꽃잎이 등(燈)처럼 환한 때죽나무. 떼구르르 굴러갈 듯 동글동글하고 몽실몽실한 불두화. 그 밖에도 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수많은 가야산의 생명. 처음엔 모양도 이름도 몰랐던 나무와 꽃들이, 대문동 쉼터에 다다를 즈음에는 눈에 익어 이름표를 보지 않고도 절로 이름이 떠올랐다. 이렇게 아름답고 푸른 길에 아스팔트 도로가 깔릴 뻔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다. 원래 충남도는 왕복 2차선 ‘가야산 순환도로’를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가야산의 자연 및 문화유산이 훼손될 것을 우려한 지역주민과 불교계, 환경단체가 ‘가야산지키기시민연대(이하 가야산연대)’를 조직하고 이에 맞섰다. 처음에는 평행선을 달리는 듯했지만 3년간의 긴 산통 끝에 도로개발 계획을 백지화하고 생태탐방로를 조성하는 데 합의를 이루어 지금의 생태탐방로로 다시 태어났다고. 개발과 보존이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민과 관이 대화를 통해 ‘윈윈’한 훈훈한 이야기가 이 ‘백제의 미소길’에 숨어있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뿐일까? 백제의 미소길에 얽힌 사연은 아마 산과 인간이 존재했던 아주 처음의 날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나는 산이 품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멀게는 고대 중국과 백제 사신들이 오가던 외교의 역사부터, 구도를 위해 오가던 스님이 마음을 닦던 이야기, 나라 잃은 백제인이 부흥을 꿈꿨던 이야기, 동학 농민군이 개혁을 꿈꿨던 이야기, 조선 말기 박해받던 천주교인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산에 숨어들어 숯을 만들던 이야기, 가깝게는 한국전쟁 시절 피난길에 올랐던 이들의 이야기까지.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인간의 이야기가 이 길을, 가야산을 타고 흘러갔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길을 걸어간 2013년의 내 이야기 하나가 더 얹히겠지. 어느 산이든 거기에는 인간과 부대끼며 만들어간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내가 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나의 만족만 위해 걸었다면, 이번 산행은 그저 한 번의 등산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어내려 가는 것은 그 길을 걷는 이의 몫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이제 내게 산은 다 똑같은 산이 아니었다.


꼬불꼬불 돌아가도 괜찮아

탄을 자아내는 풍경 앞에서는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댔고, 계곡에선 기꺼이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갔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그랬을 뿐인데, 2시간이 걸린다던 백제의 미소길을 5시간 넘게 걸었다는 게 함정. 아무리 내가 허술하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스터리다. 물론, 좀 헤매긴 했다. 상가리 코앞에 있는 백제의 미소길 표지석을 못 찾아 한참을 부근에서 서성였고, 마지막 구간을 통과하고도 길이 끝난 줄 모르고 또 한참을 서성였으니까.
털어놓자면 서울에서 예산으로, 다시 서울로 오가는 길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백제의 미소길을 다 걷고 난 뒤 서산 터미널로 갈 방법이 막막했던 나는 지나가는 차를 붙잡아 올라탄 뒤, 수덕사 산채비빔밥을 사주고 예산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말에 당일치기 계획을 1박 2일로 바꾸고 그분 댁에서 하루 묵기까지 했다. 좋으신 분이었기에 망정이지 이 이야기를 들은 모든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사실 나도 내가 놀랍다). 산행에 5시간이 걸린 것이 어쩌면 그나마 빠른 것이었을 수도 있단 생각이 스친다. 하지만 그렇게 꼬불꼬불 돌아갔기에 나는 남들이 그냥 지나쳤을 지도 모를, 때죽나무꽃이 그림처럼 흩뿌려진 연못 속에서 올챙이가 헤엄치는 것을 보았다. 찬찬히 들여다보며 걸었기에, 솔지 오솔길에서 습기를 먹어 폭신폭신한 나무 부스러기의 감촉과 밟을 때마다 사그락사그락 거리는 소리를 더 즐길 수 있었다.


길이란 원래 나보다 먼저 헤매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한 이들이 있었기에 생긴 것. 꼬불꼬불 돌아가도 괜찮다. 조금 오래 걸려도 괜찮다. 산을 정복했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라면 2시간은 충분할지 모르지만, 산과 내가 1:1로 마주보며 추억을 쌓기엔 너무 짧으니까. 그래서 앞으로 어떤 산을 만나든, 나는 기꺼이 헤매기로 했다. 많이 헤매는 만큼, 산은 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테고, 산과 나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갈 테니까 말이다. 글·사진 최새롬


가야산 백제 미소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충남 예산군청 경영관리실
041-330-2317
yesan.go.kr(예산군청)



· 코스 : 예산 덕산 상가리 → 상가리 미륵불 공원 → 대문동 쉼터 → 가야산 수목원 → 으름재 쉼터 → 백제의 미소공원 → 퉁퉁고개 쉼터 → 소나무 쉼터 → 서산 운산 용현리(총 6.54km)

· 교통 : 교통편이 적고 무척 불편하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예산역 앞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덕산행 버스를 타고 덕산에 내린 뒤 택시를 이용해 남연군묘 앞까지 가는 것이 편리하다. 

· 볼거리 : 김좌진 · 한용운 생가지, 추사고택, 수덕사, 덕산온천, 남연군묘, 용현자연휴양림, 보원사지, 서산마애여래삼존상(국보 84), 개심사, 해미읍성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