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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햇빛 아래 노니는 삶

지리산 자락에 드리운 서울 처녀의 구례라이프


서른 둘, 적지 않은 나이가 된 나는 작년 봄부터 시골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서른이 넘어서자 이십대 때의 다급하고 분주했
던 마음이 가라앉았고, 직장생활도 해볼 만큼 해보니 더 이상 삶에 새로움이 없을 것이 분명하다는 현실이 이젠 내 이야기다. 서울에서 삶, 대도시에서 끊임없이 정신노동, 소비를 부추김 당하며 쳇바퀴 돌 듯 사는 삶에 한계를 느꼈다. “나이가 찼으니 결혼을 하지” 라는 말을 들었지만 결혼은 뭐 쉬운 문제이던가. 결혼을 하기 위해 돈을 벌고, 혹은 대출금을 갚으며 살기엔 짧디 짧은 이내 인생과 젊음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삶을 단출하게 만들고 돈을 적게 벌더라도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소박하지만 풍성한 삶을 누릴 줄 아는 지혜를 갖고 싶어 나는 도시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구례를 만나다
역시 뭐든 시작은 쉽지 않다.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방문하게 된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어 다시 그곳을 무작정 찾아가기를 몇 차례, 알고 보니 그곳이 귀농의 메카였다. 서울처럼 집에 세를 놓는 사람이 많지 않아 차라리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것이 빠를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막막함을 가지고 돌아다니다가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된 몇몇 분들의 조언으로 전라남도 구례군에 눈을 돌렸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에~~’ 노랫말처럼 하동과 구례는 경상도와 전라도로 나뉘어 있지만, 섬진강이 흐르는 지리산 남쪽에 위치하여 문화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인터넷 세상에 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나 역시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구례에 귀촌한 분들과 연결이 되었고, 지난 가을 빈 집이 나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일을 하다가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언니에게 차를 빌려서 그날 밤 서울에서 구례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지리산 자락이 마음에
다음날 아침! 집을 소개해주시는 분과 함께 동네로 들어서는데 탄성이 나온다. 구례는 한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 바퀴를 쭉 돌아보면 온통 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지리산이 이리도 따뜻하고 포근한가 싶을 정도로 마을 뒤로 펼쳐진 지리산의 모습이 아름다움 그 자체로 내 눈을 채운다. 노고단이 보이는 동네 길을 따라 작은 골목에 들어서는데 색이 바랜 파란 돌기와가 먼저 보인다. 남도지방의 일자형 옛 한옥, 마당도 넓고 작게나마 정원과 텃밭도 가꿀 수 있는 공간도 넓은 방과 툇마루, 그리고 예쁜 창호지 문을 보니 내 가슴이 콩탁콩탁 뛴다. 드디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인가! 주인아저씨의 여러 가지 요구사항을 잘듣고 있자니 어디선가 서울 처녀가 혼자 이 시골에 뭣하러 오려는가 하는 눈초리가 얼굴을 때렸다.그러나 노고단이 보이는 햇살이 가득 찬 마당을 거닐 수 있는 예쁜 한옥에 내가 살게 된다는 사실이 꿈같아 기쁘기만 했다. 무상으로 5년간 살기로 계약서에 사인을 한 후 그 즈음 읽었던 신문기사가 생각이 났다. 30대 초반의 남성이 결혼을 앞두고 아파트 전세금을 구하지 못해 절망감에 자살을 했다는 내용이던가... ‘ “이 정도는 해놓고 살아야지” 하는 암묵적 기준에 미달이 되면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일까? 어쩌면 그런 시선으로 세상으로 바라보는 관계망을 일탈하여 새로운 삶의 기준들을 만들고 삶을 좀 더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들이 스쳤다.

드디어 입성
서울에 돌아와 하던 일을 정리하고 한 달 뒤 이사를 했다. 무엇이 날 이렇게까지 떠밀었을까, 도시를 떠나 시골에 가서 내가 무얼 하려고 짐을 싸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집을 고치는 동안의 피곤함이 있지만 아침이면 맑고도 개운한 정신으로 일어나게 되는 하루하루가 신기하다. 자정을 넘겨 집에 들어와서 각성된 정신이 가라앉지 않아 불면증에 시달리며 몸과 마음이 지쳐가던 일상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담을 넘어 기웃거리시는 어르신께 인사를 하고 커피를 타드리면서 나는 예상가능한 똑같은 질문에 준비된 답을 읊는다. 할머니들께서는 “신랑은 어딧쏘? 워매, 혼자살아부러? 쪼까 거시기 하것쏘잉, 힘들재.”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시지만, 그래도 수줍은 미소로 담장을 넘겨보시며 갖가지 먹을 것들을 잘 챙겨주신다. 그렇게 나는 지리산 남쪽 넓은 들이 있는 구례군 광의면 연파리의 작은 마을 입성에 성공했다.
똑바른 걸음으로 허리를 펴고 걷는 할머니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분들의 지혜와 깊이를 누가 물려받아 이 땅의 산물을 지켜낼까. 도시 태생인 나 같은 사람이 마음만으로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너무 이상적인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들, 생각만 하다가 삶과 추구하는 바가 일치되지 않는 그 괴리감이 싫어 결국 시골에 왔다. 일단 살아보는 게 지금의 목표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그 구부러진 손과 허리에 기대지 않으면 제 숟가락에 밥 한술 뜰 수 없는 이 땅의 현실이 안타깝다. 세상에서 가장 낮고 연약하고 배움이 짧은 것 같으나 힘을 다해 이 땅을 바치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옆에서 배울 것들 잘 배우는 날들이 되길 기도한다. 좋은 날들, 꿈꾸는 날들, 꿈을 이루는 날들로 이제부터 내 인생 잘 펼쳐지기를!

김루| 도시에서 오랜 시간 영어강사로 일을 하다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진리와 자유,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고 연주하며 살아가고 싶어 시골에 내려온 책과 커피와 채소를 사랑하는 지리산 남쪽에 사는 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