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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햇빛 아래 노니는 삶

땅이 내게 준 선물

“여보세요, 김루씨죠?” 전화기를 넘어 들리는 낯선 목소리. 저 온동에 사는 노래하는 사람이예요.” 구례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 누가 이사를 왔는지, 어떻게 사는지 소문이 나면서 새로운 만남이 생겨나고 있는 중에, 동갑내기 노래하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와 만나던 첫 날, 우리는 처음 같지 않은 익숙함으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는 구례군 주민이 합심해서 연극을 올리는 데 함께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농부 아저씨, 살림하는 아주머니, 귀촌한 젊은 부부등 나이도 다르고 사는 것도 다르지만 구례라는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극단을 만들고, 공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나는 이사를 하고 석달을 혼자 집을 고치며 빨리 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던 중이었는데, 새로운 만남과 사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새로운 만남의 축복이
섬진강 강줄기를 따라 넓은 논밭 사이에 자리 잡은 섬진아트홀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동네에서 보던 꼬맹이, 아줌마, 아저씨들도 하나 둘씩 눈에 띄기 시작한다. 농부로 살던 아저씨는 주인공이고, 평생 살림만 하던 아주머니는 극에서도 아주머니다. 지리산 국립공원에서 일하는 언니는 부잣집 사모님이고, 작게 농사를 지으며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치는 언니는 수녀님으로 분해 모두 처음으로 서는 연극 무대를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다.
나는 무대 뒤쪽 어두운 구석,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런 큰 아트홀에서 공연을 해보다니 정말 재미있는걸. 구례에 오니 이런 일도 경험하는구나 싶다.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공연을 즐기고 무대 뒤에서 음악을 담당하며 배우의 움직임과 관객의 표정을 지켜보며 어쩌면 내 인생도 이렇게 웃고 또 울면서 지금까지 흘러왔구나, 앞으로는 어떤 삶이 펼쳐질까 기대의 마음이 마음에 옹글옹글 솟아오른다.
연극을 통해 만난 언니네 집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누구는 집에서 먹다 만 빵, 과자, 음료를 가지고 오고, 또 누구는 매실짱아지를, 어디선가 얻은 굴과 조개들을 가지고 모였다. 작은 옛날 한옥을 예쁘게 고쳐서 살고 있는 언니네집의 아늑함과 편안함을 누리며 소비하지 않고도 만남을 누릴 수 있고, 대단한 것들이 아니어도 기쁘게 선물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움 그 자체로 마음에 남는다. 그날 언니들과 함께 밭농사 지을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마음을 모았다. 얼마 뒤 우리는 산아래 쓰지 않는 땅을 구해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가득한 풀을 뽑아내는데 도시내기였던 젊은 처자는 하얀 운동화를 신고가는 바람에 결국 맨발로 흙을 밟았다. 근데 웬걸, 기분이 너무나 좋다. 흙을 밟는 기분이 이런거라니,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좋아서 집에 돌아와 마당의 텃밭을 갈면서도 신발을 벗는다. 지금껏 한번도 흙을 밟지 못하고 네모난 시멘트 건물에 살다가 차에 실려 또 시멘트 건물로 들어가 공부를 하고 또 차에 올라타 학원을 전전하며 살아갔던 나. 또한 그런 삶을 사는 많은 아이들이 이렇게 가끔이라도 흙을 밟고 자연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일상을 노래할 수 있다면
발걸음을 시골로 옮겼지만, 나는 여전히 도시 사람처럼 살아가려는 것 같다. 여전히 돈으로 무언가를 구하는 게 편하지 몸으로 감당하는 것은 어렵다. 돈이 필요해서 일을 하려고 하지 일 자체에 기쁨을 누리지도 못한다. 하지만 최소한 시골 살이를 시작한 이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하던 습관이 많이 줄어들기도 했고, 예민해지기도 해서 함부로 지갑을 열거나 돈으로 해결하려 드는 모습이 꽤 줄어 들었다.
삶은 대단하지 않은, 늘 지나가는 일상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그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고민과 생각들이 대단하지 않은 일상을 더욱 빛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담장 넘어 먹을 거리를 넘겨주시는 이웃들과 주머니는 두둑하지 않아도 언덕 너머 사는 친구와 함께 밥을 지어먹고 김치를 지져먹으며 혼자 힘으로 아등바등하며 살아남으려 애썼던 나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다. 내 일상이 누군가와 연결이 되고, 그 넘어 자연과 연결이 되며 내가 유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해 가는 순간, 그 알 수 없던 깊은 외로움들을 충분히 달랠 수 있으니 살아갈 이유 또한 생겨나는 것이다. 텃밭에 나는 꽃들과 마을 어귀에 앉아 햇빛을 쬐는 할머니와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논에 나가시는 농부 아저씨, 마당 너머로 보이는 해질녘 노을, 둘레길과 동네 한가득 피어난 벚꽃들, 무엇보다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 구례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 그네들과 함께 나는 하루를 살아가며 작은 일상을 노래한다.


김루| 도시에서 오랜 시간 영어강사로 일을 하다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진리와 자유,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고 연주하며 살아가고 싶어 시골에 내려온 책과 커피와 채소를 사랑하는 지리산 남쪽에 사는 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