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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인터뷰

80호_고정원의 사랑법


 

고정원, 인터넷 서점이 막 등장했던 즈음, 그날 나온 책을 다 읽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선배의 꼬임에 넘어가 인터넷 서점 디렉터로 일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지역사회 교육전문가가 되었고, 지금은 나우학교의 길잡이 교사다.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기존에 존재하는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낯선 발걸음들을 이어가게 한 것은 책과 아이들. 스물 이후로 책 이야기와 아이들 이야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글을 써서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그녀, 고정원 선생님에게 책으로 자신과 아이들의 인생을 바꿔나간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넷 서점 디렉터에서 지역사회 교육전문가라니 꽤 갑작스러운 전환을 하셨어요.

스무 살 때 소위 달동네라고 불리던 봉천동에서 빈민 활동을 했어요. 농활처럼 도배해 주다가 방과 후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어쩜 그렇게 예쁜지, 그 후에도 아이들을 계속 만났어요. 그런데 몇 년 후 동네 철거 과정에서 아이들의 삶이 망가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 거예요. 인터넷 서점에서 일하느라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자꾸 보고 싶고, 함께 책 읽고 싶은 마음이 커지더라고요. 그즈음에 공교육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을 지원하는 교육복지 사업을 시작하면서 지역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을 찾았는데, 마침 제가 가진 경력으로 지원할 수 있었어요.

 

지금 교사로 계신 나우학교도 평범한 학교 같지는 않아요.

나우학교는 노원구청에서 처음 만든 위탁형 대안학교에요. 예전에 제가 있던 공립학교는 그 안에 교육복지실이 있었어요. 학교 부적응 아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그리로 찾아오곤 했거든요. 같이 밥도 먹고 함께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거죠. 때론 아이들을 모아서 체험학습을 가거나 상담이 필요한 아이들을 선별해서 상담소와 연결해 주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곳 나우학교는 좀 달라요. 학업 중단 위기에 있는 아이들을 일반 학교에서 우리 학교에 위탁하는 시스템이에요. 그러다 보니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다거나 규율을 어길 때 위탁을 해지해야 하지만 한 번 더 기회를 가져보자고 하곤 해요. 국영수사과 기본 교과를 편성하는 건 같은데 그 외에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하고요. 중학교는 생긴 지 2년 반이 됐고, 고등학교는 이번에 새로 시작해요. 저는 여기서 고등학생 담임교사로 반 아이들 관리와 독서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에요.

 

아이들이 책을 그리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책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선뜻 대답하는 아이들은 없지만,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준 게 책이었어요. “어제 어떤 애를 만났는데.” 그러면 혹해서 들어요. 그때 사실은 책이야하는 거죠. 아니면 책 이야기를 하다가 아직 여기까지밖에 안 읽었거든. 궁금하지 않냐?” 그러면 아이가 읽기도 하고. 아이들이 앉는 자리에 슬쩍 책을 두거나 벽에 책 표지를 붙여놓으면 와서 읽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 부담감이 아이들을 책과 더 멀어지게 하는 것 같아요. 아이들과 책으로 편하게 이야기하는 게 진정한 희망의 인문학교육이 아닐까요.

 

책 읽기를 통해 변한 아이들이 있었나요?

제가 지금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데요. 아이들이 중학교 때 선생님과의 행복했던 기억 덕분에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했다고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 많겠지만 저는 그중에 독서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독서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거나 수치화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정보 수집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궁금한 게 있으면 무조건 저에게 물어봤는데 이제는 스스로 찾아보는 거죠. “옛날에 선생님이 신문 보셨잖아요. 그래서 저도 읽기 시작했는데 재밌더라고요라고 한다거나 선생님 요즘 이런 책 좋아요.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요라고 해요. 그렇게 1~2년 지나면 제가 짜던 독서 수업 교안을 아이들이 20차씩 짜 오고 평가서까지 만들어요. 그런 경험들이 빛을 발해서 유아교육과 가서 유치원 교사하고, 디자인과 가서 그림책 만들고 하더라고요.

 

보람이 큰 만큼 때때로 실망이나 좌절한 적도 있으실 것 같아요.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실망한 적이 없어요. 기대를 안 하니까요. 기대를 왜 해요. 제 속으로 낳은 제 아이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요. 그렇지만 좌절한 적은 있었어요. 오토바이를 타거나 우울증이 심한 아이들을 보면서 제 나름대로 마지노선으로 여긴 게 있었거든요. 만나고 있는 아이가 죽으면 애들 만나는 거 그만둬야지, 하고요. 그런데 어느 날, 아이 하나가 정말 죽었어요. 힘들어서가 아니라 희망이 안 보이니까 죽음을 택했어요. 아이 아빠보다 저에게 먼저 연락이 오고, 투신이라서 온 동네가 전부 알게 되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애들에게 문자가 수십 통 쏟아지는 거예요. 아마 선생님이 제일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당시 둘째 키우는 것도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두 손 들었지만 아이들이 저를 그냥 놔주지 않았어요. 죽은 아이의 장례 치르는 과정도 그렇지만 많은 아이가 나도 저 꼴 나겠지하는 거예요.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지요. 정신없이 수습하고 학교로 돌아갔어요.

 

아이들이 선생님을 붙잡아 준 셈이네요.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어떤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저를 상담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뭐할까? 배고프지 않냐?”면서 상담학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표현들을 써도 애들은 계속해서 그렇게 불러요. 심지어 상담 선생님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저는 아이들을 제 친구라고 생각해요. 아이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이 아이들이 장차 좋은 선생이 되고 저의 좋은 동료가 되겠구나, 싶어서 재미있어요. 제가 애들에게 만날 뭔가를 배우거든요. 카카오톡 보내는 법도 배우고 빈집 문 열고 들어가는 법도 배우고. 하하. 저도 배우는 걸 좋아하지만 아이들도 가르칠 때 열광해요. 배움을 같이 하고,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 멋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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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희생하지 않는 사랑을 말했다. 누군가 희생하면 다른 누군가 - 희생을 받은 사람이든지 아니면 공동체의 동일한 만큼의 희생을 베풀어야 하는 다른 누구든지 - 그만큼의 희생을 메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부담감은 사랑이 아니지 않으냐는 고정원 선생님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사랑이란 상대에 대한 무력감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만약 사랑이란 단어를 굳이 정의해야 한다면 인생의 굽이굽이를 함께 가는 것쯤으로 해두자. 앞으로 도착할 어느 지점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므로. 10, 20년 후에 대한 염려는 잠깐 미뤄두고 지금 이 시간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삶과 사랑을 대하자. 누군가와 함께 오늘을 걸어가며 그 이야기를 나눈다면 더욱 좋을 일이다.

 

·김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