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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매거진<오늘>/문화선교연구원

영화 <더 로드> 종말 이후 남은 자들에게 희망할 것이 있다면...

감독 : 존 힐코트

출연 : 비고 모텐슨, 코디 스밋 - 맥피 

영화적 종말론에 있어서 두드러진 변화가 있다면, 과거에는 대개 지구의 종말을 앞에 두고 전개되는 사건들이 중심이었다. 전쟁, 환경, 외계인의 침입 등 종말을 초래하는 각종 원인들이 지구의 미래를 위협할 때, 영화는 영웅주의적이거나 혹은 휴머니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럼으로써 지구는 종말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기억이 정확하다면,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의 작품으로 2012 지구종말론에 근거해서 제작된 <나는 전설이다(2007)>부터는 종말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 <나는 전설이다>는 바이러스로 모든 인간들이 사라지고 황폐해진 지구의 유일한 생존자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야수로 변종된 인간과 사투하면서 어딘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인간들을 지킬 수 있는 백신개발을 위해 노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구의 종말을 이야기하다
비록 2009년도에 제작되었지만 우리나라에는 2010년에 개봉된 힐코트 감독의 <더 로드>는 조금 다른 상황을 전개한다. 스토리는 다르지만 <나는 전설이다>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 예컨대, 인간의 변종 대신에 식인습관을 갖게 된 인간들을 등장시키고, <나는 전설이다>에서는 어딘가에 살아 있을 백신을 개발하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더 로드>는 어딘가에 있을 착한 사람들을 찾아 여행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작품 <2012(2009)> 역시 2012 지구 종말론에 근거한 것으로, 비록 종말 이후는 아니라 해도 종말의 위기에서 인간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이며, 종말 이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영화였다. 위기의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사는 것이 미래를 보장하는 태도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종말의 위기에서 벗어난 인간들의 범위를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 설정한 것은 현대 사회를 이끌고 지배하고 있는 중추적인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강하게 시사한다. 지구의 생존자인 그들에 의해 새롭게 건설될 지구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라는 질문을 강하게 제기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행되는 재력가와 권력가들의 행태들을 염두에 둔다면, 재력과 권력의 맛을 본 사람들이 건설하는 세계는 지금보다 결단코 더 나아질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종말이란 인간의 종말일 뿐 지구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면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을 강하게 갖게 된 영화였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는 듯 했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종말 이후의 삶에 대한 기대감에 큰 손상을 입힌 영화였다. 종말을 말함에 있어서 희망과 희망의 이유를 말하는 기독교 종말론의 과제를 더욱 확신하게 되기도 했다. 

세상의 끝, 그리고 그 이후  
<나는 전설이다>와 <2012>의 핵심적인 주제를 종합한 듯이 보이는 <더 로드>는 밝혀지지 않은 원인에 의한 지각 변동으로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 버린 지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동명의 소설(코맥 맥카시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겨울이라는 설정만 알려져 있을 뿐, 황폐해지게 된 이유도 밝히지 않고 있고, 언제, 어느 지역에서 일어난 일인지도 모른다. 종말 이후의 시간이 많이 지났거나, 아니면 영화가 철저하게 종말 이후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심지어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름조차도 밝히고 있지 않은데, 그들에게 이름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종말 이후의 상황에서 생존자들이 인격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영화 속 생존자들은 생존을 위해서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며, 심지어 인육을 먹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경계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더 무서운 세상이 바로 <더 로드>의 배경이라면 배경이다.
더 이상의 미래를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엄마는 자살하고 살아남은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존재 이유로서 살아남게 된다. 하나밖에 없는 권총에는 두 발의 총알이 있을 뿐이다. 원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자살을 하기 위해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아들을 지키기 위해 한발을 쏜 이후로는 한발밖에 남지 않은 상태다. 아버지와 아들은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따뜻한 남쪽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착한 사람들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마음속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아들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으며 아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기침할 때마다 각혈을 하는 상태다. 파란 색일 줄만 알았던 바다마저도 잿빛으로 변한 모습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임을 잘 말해준다. 점점 죽어가는 자신을 보면서 그는 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지만, 남쪽에 채 이르기도 전 어느 바닷가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홀로 남은 아들은 자신들을 몰래 따라왔던 가족(아버지와 엄마와 두 자녀)을 따라 함께 남쪽으로 여행을 계속한다.

절망 끝, 한자락 희망
존 힐코트 감독은 소설의 복잡한 내용들을 매우 단순화시켜 놓았다. 그렇다고 소설의 내용이 많이 생략된 것은 아니다. 소설의 내용을 충실하게 영상으로 잘 옮겨놓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매우 인상 깊었던 장면은 지도상에 파랗게 표시된 바다에 이르렀을 때의 모습이다. 파랑색은 인간의 희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 색이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실마리를 그들은 남쪽을 향한 여행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보아야 했던 바다의 모습은 그들이 지금까지 벗어나고자 했던 곳과 전혀 다르지 않은 잿빛이었다. 더 이상 소망할 것이 없다는 말로 들린다. 홀로 남은 아이의 모습이 더욱 절망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더 이상 희망의 실마리가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이런 상황으로 영화가 끝났다면, 영화는 암울한 이미지로만 기억될 뿐, 관객에게 그렇게 강한 인상을 각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결코 이런 질문으로 끝내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해버린 세계에서도 희망할 것이 아직 남아 있음에 대한 강한 여운을 남긴다. 즉, ‘남쪽’의 존재에 대한 상상마저 잿빛으로 변해버렸음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다른 곳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는다. 아버지와 아들을 줄곧 따라왔다는 가족의 모습에서 대답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뒤를 따라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의 존재와 생명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아들의 생명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등대 삼아서 길을 나섰던 것이다. 홀로 남은 아이에게는 이제 그들이 등대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족 중 누구도 절망하지 않고 서로의 생명을 지켜나가는 사람들로서 착한 사람들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여 말한다면, <더 로드>는 종말 이후의 세계가 얼마나 암울하고 절망적인지를 보여주면서, 종말 이후에도 희망은 존재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탐색한다. 모두가 절망할 수밖에 없고, 자살마저도 사치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인간은 과연 무엇에 근거해서 희망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을 등대로 삼고 살아갈 것인가?
<더 로드>는 종말 이후에도 인간이 다른 생명을 지키려는 희생적인 모습이 있는 한, 인간은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즉, 다른 생명을 내 생명을 위해 소비하려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며, 다른 사람의 생명을 내 생명과 같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키려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최성수|서강대학교 철학과, 독일 Bonn 대학교 신학석사, 신학박사. 현, 장신대, 한남대, 한일장신대, 대신대 출강. 저서로는 <영화관에서 만나는 하나님>, <영화 속 장애인 이야기>, <영화 속 기독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