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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매거진<오늘>/문화선교연구원

사랑이 아닌 사랑이야기 - 영화 <500일의 썸머>

감독 : 마크 웹
배우 : 조셉 고든-레빗, 조이 데샤넬  

말하는 순간, 확인하게 되는 것
사랑은 느끼는 것이지 결코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고, 말한다고 해서 사랑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사랑을 확신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사랑을 말하는 순간, 사랑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 아닌 것이 될 위험이 있다. 사랑은 행위인 것이고 느끼는 것이지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행위와 느낌이 살아있는 한, 사랑은 이야기로 회자되기를 거부한다.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딜레마는 서로에 대한 (사랑)행위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또 서로의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할 때다. 이쯤 되면 그 뜨거웠던 열정으로 불태웠던 사랑은 어디로 간 것인지를 묻게 된다. 갑작스럽게 사랑은 정으로 변하고, 신뢰와 의리로 바뀌며, 결국에는 함께 있는 것 자체를 사랑으로 여기며 자족한다. 결코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던 사랑은 이제 이야기가 되어 둘 사이에서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비록 행위나 느낌은 없다 해도, 회상 속에서 사랑은 여전히 존재한다. 계절마다 세상이 바뀌듯이, 사랑 역시 시간에 따라 그렇게 옷을 갈아입는다. 단, 적어도 서로가 헤어지지 않고 함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정의할 수 없는 난제, 사랑
사랑은 난제다. 셀 수 없이 많은 정의들이 있지만, 사랑은 결코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사랑은 모두가 부분적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오해를 일으킨다. 기대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가 하면, 사랑이 아닌 것도 있다. 모양은 사랑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랑의 진정성이 없었다는 말이다.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생각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묻고 따지는 말에 대해, ‘사랑이 아니니까 변한다’고 매몰차게 대답한다. 누구는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신나게 달려왔는데, 누구한테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하지만, 그러나 일방향 사랑이었다는 말이다. 어떻게 사랑이 아닐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이다. 그녀에게 사랑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지만, 감독은 더 이상 그녀의 사랑을 추측할 만한 단서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녀의 태도는 사랑의 본질을 믿고,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또 사랑의 모습은 다양하면서도 공통점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함께 꾸는 다른 꿈, 동상이몽
썸머와 톰의 관계도 그랬다. 두 사람이 서로와 더불어, 그리고 서로를 위해 보인 모든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썸머가 아무리 친구관계를 전제하고 교제를 시작했다 해도,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톰은 단순한 친구관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믿었다. 관객들 역시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사실 관객들로 하여금 그렇게 믿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재미없는, 무의미한 영화가 된다.
적어도 톰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회사내 복사실에서 은밀하게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서로 잠자리를 함께 하고, 함께 시간과 추억을 공유하며, 공통된 이상을 나누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사랑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세상이 모두 활기로 가득 차고, 톰으로 하여금 날아갈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분명 사랑때문이었다. 그러나 썸머는 달랐다. 톰과의 관계는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뤄지는 친구관계였다. 톰이 사랑으로 생각하는 것, 그것은 톰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톰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적지 않은 시간을 썸머와 함께 보내며 느낀 것들, 썸머와 자신이 했던 모든 행위들이 어떻게 사랑이 아닐 수 있단 말일까? 사랑에 대한 보통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톰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톰의 어린 여동생은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좋은 기억들이었을 뿐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그러니 나쁜 기억들을 통해서 사랑의 환상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한참 어린 여동생도 알고 있는 사실을 성인인 톰이 모르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었을까? 이런 오해, 이런 생각의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여하튼 톰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톰의 기대와 생각과는 달리 썸머에게는 결코 사랑이 아니었다.톰과 썸머 사이를 가장 적합하게 표현한다면, 아마도 동상이몽이 될 것이다. 사랑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
한편, 톰과 썸머 관계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무의미한 시간들, 그로 인해 톰이 괴로워하고, 둘 사이의 관계가 사랑이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는 썸머의 모습을 보면서, 남녀 사이에서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이 아닌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궁금해졌다. 사랑의 진정성인가? 계절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인데, 왜 톰과 썸머에그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
톰과 썸머의 관계에서, 그리고 둘과의 관계가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썸머의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지금까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일들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남녀의 소통 방식이 바뀌고, 이성간의 친구 관계에서 경계이며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변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랑의 진정성은 무엇이고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대개 마음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톰과의 관계에서는 결코 없었던 것이 있었기 때문에 결혼할 생각을 했다는 썸머, 그녀에게 사랑, 곧 사랑의 진정성은 결혼을 통해서 확인되는 것이었다. 사랑 같은 것은 없고 단지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해왔던 그녀였지만,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과 동일한 삶을 톰과 공유했음에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기를 거부했던 그녀는 마침내 사랑을 발견하고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결혼을 결코 원하지 않았지만, 결혼할 수밖에 없는 결정을 내리도록 만든 강력한 힘, 바로 그것이 썸머에게는 사랑이었다.

사랑 그리고 결혼
그동안 우리 주변에서 숱하게 들어왔던 말들,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과 결혼했었다는 말들이 갑자기 구차한 변명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간 소통 방식의 변화를 깨닫지 못한 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썸머의 말에서 오히려 사랑의 진정성을 강하게 느낄 정도다. 이에 반해 결혼했으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찾으려고 하거나, 사랑하면서도 조건에 매여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비겁하게 여겨졌다. 사랑의 문제로 인해서 심각한 수준의 가족해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오늘날, 사랑과 결혼을 분리해서 생각하려는 이 시대의 모습 속에서 썸머의 결정은 오히려 외로운 싸움의 결과였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과 몸을 분리하는 썸머의 논리가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비록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소통의 방식이 바뀌었다 해도 몸은 마음과 함께 인격의 한 부분이다. 몸으로 소통했던 모든 것들을 마음이 부정하거나, 아니면 마음으로 소통했던 것들을 몸으로 부정하는 것은 이기적이며 탐욕적이다.

최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