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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침묵이 말씀하다 ㅣ 영화 <위대한 침묵> Vs <디스트릭트9>

침묵, 드디어 입을 열다 _ <위대한 침묵>
내 이름은 침묵이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나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었다. 그러니까 태초부터 있었다는 ‘말씀’의 형님뻘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말에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갈 신실한 신앙인들이 많을 거다. 불쾌함을 넘어서 적개심으로 내 이야기에 귀를 닫아버릴 것만 같다. 좀 더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면(솔직히 제일 억울한 게 내가 몹시 불친절하다는 평판이다.) 여기서 얘기한 ‘말씀’은 온 우주의 주인이신 그분이 아니라 단순히 ‘언어’를 가리킨 것이다. 인간의 혀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것들을 말한다. 한번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는…. 흔히 그게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단다. 사람들은 그런 불완전하고 위험천만한 것에 ‘올인’하여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더구나 상당수의 말은 일정한 지역을 벗어나면 의미 없는 소리로 전락한다. 모두가 통하는 말을 만든다며 발버둥을 치더구만. 그걸 ‘영어’라고 하던데…. 인간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게 사람 사이에 담을 만들고, 계급을 만들어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특히, 돈 많고 능력 있는) 도구에 불과한 그걸 위해서 가족들이 생이별을 해서 산다. 소통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게 아니라 꾸준히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고 말을 섞는 시간들이 필요한 건데, 저렇게 단절돼서 살면 부모와 자식이 영영 벽을 쌓아올린 채 가끔 면회하듯이 삐쭉 얼굴 한번 보는 푸석푸석한 관계가 될게 분명하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람이 나서서 그걸 잘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이나 주저리 늘어놓던데, 참 딱한 노릇이다. 안쓰럽기도 하고…. 그 에너지의 십분의 일만 쏟아도 장담컨대 바벨탑에서 경험했던 혼란스러움은 확 사라질 거다. 내가 하는 말을 너무 못 알아들어서 이렇게 나섰다. 내가 존재감이 없다고? 사실, 난 어디에나 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존재는 나를 만드신 주인님과 나 외에는 없다. 뒷부분에 더 다루겠지만 수도원에 틀어박혀서 밥만 먹고 기도만 했던 사람들은 그분과 가장 많이 닮은 것이 바로‘ 침묵’이라고 말한다. 공기처럼 말이다!

지옥은 아우성과 함께 온다 _ <디스트릭트9>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곳이다. 피부색깔 조금 다른 게 뭐 그리 대수라고, 하얀 색깔의 인간들이 그렇게 유세를 떨더니 개 버릇 누구 못준다고 우주선을 타고 날아온 손님들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지구인들은 자신과 다른 걸 견디지 못한다. 인종의 장벽도 아직 극복하지 못했는데, 새우처럼 생긴 외계인을 이민자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제는 인권 같은 귀찮은 개념이 생겨서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한곳에 몰아넣는다. <디스트릭트9>. 물론 자기들은 절대로 살 수가 없는 동네다. 그런 곳은 ‘집’이라 하지 않고, ‘수용소’라고 부른다. 그런데서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들을 가두어야 한다. 그때 작동되는 내적 움직임이 양심이다. 이게 인간 안에 심겨있는 하늘의 흔적이다. 이 보물을 잘 발견하기 위해서 해야 되는 작업이 잠잠히 있는 거다. 그러면 난감한 소리가 들려온다. ‘디스트릭트9에서 그들을 풀어줘야 한다. 너도 한번 살아봐라. 네가 살 수 없다면 남도 살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볼 땐 인간의 역사는 내면에서 품어 나오는 생명의 음성과 이것을 막으려는 외부의 압력, 이 둘의 싸움처럼 보인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침묵의 이름이 철저히 무시됐던 이유
이다.

‘바깥 세상이 방 안보다 환하면 / 유리창이 바깥 세상을 보여주지만 / 방 안이 바깥 세상보다 환하면 / 유리창은 방 안 풍경을 보여준다. / 유리는 더 밝은 쪽 편인 게 분명하다.’(이현주)

외계인을 더 한적한 곳으로 몰아넣는 작전이 벌어진다. 그 진두지휘를 맡은 사람이 ‘마커스’인데, 어쩌다가 오염이 되어 손이 새우처럼 생긴 이방인으로 변해간다. 가족도 그를 피하고 어떤 지구원주민들과도 소통할 수 없다. 비로소 인간의 아우성으로 부터 차단되어 외로움에 떨면서 마음의 유리를 보게 된다. 역설적으로 그때부터 그는 순도 100% 인간들보다 더 인간적이 된다. 외계인은 단물을 빨아먹고 버리는 괴물이 아니라 그들도 가족을 사랑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생명인 것이다. 이게 조물주의 시선이리라. 지옥? 고독으로 내몰린 ‘마커스’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 함성, 고함소리에 갇혀있는 군중들이 아닐까? 할 수 없이 침묵할 수 있는 처지로 내몰렸지만 지옥 끝에도 자리를 펴고 있는 ‘나’를 만나면 거기가 그 순간 천국이 될 텐데….

위대한 침묵, 천국을 발견하다
한편 지옥 같은 아귀다툼을 피해서 스스로 나에게 온 삶을 던진 기특한 사람들이 있다. ‘카르투지오 수도원’ 한번 들어가면 담장 밖에로 나오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를 찍어도 되느냐는 질문에 침묵하며 16년을 기도했다. 이 사람들은 정말 나와 친하다. 수도원에서 입을 열지 않고 장작도 패고, 머리카락도 자르고, 누구나 하는 시시껄렁한 일들을 하며 지낸다. 누가 그러더구만. ‘이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수도’라고. ‘디스트릭트9’을 벗어날 수 없는 외계인처럼 그들도 그 공간을 떠날 수 없다. 더구나 입까지 다물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 그게 힘들 거라고들 수근 거린다. 하지만 내 눈에는 온 세상 가득히 들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입으로는 수없이 말을 해대고 있지만 사람들은 들으려하지 않는다. 목청만 좋아져서 볼륨만 높여가
고 있다. 키 작은 사람이 ‘루저’가 아니라, 목소리 작은 사람이 ‘루저’ 취급당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 세상사는 게 피곤할수밖에…. 이런 분위기에서는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는 수도사들은 불행을 즐기는 변태들로 취급당하기 딱 좋다. 그런데 이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곳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사랑이 넘치면서 전능하기까지 하신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에게 자신의 모든 것들을 털어놓는다. 확실히 자기 이야기가 전달되었다는 후련함이 그들을 감싸고 있다. 여기까지는 애피타이저이고, 주식은 그분께서 직접 귓가에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 음성은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고 수용해 준다.
누구도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넌 나에게 해 줄 것이 무엇이냐?’는 천박한 질문은 자리 잡을 수 없다. 그를 지으신 아버지와 아들들 사이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침묵이 흐른다. 온 몸에 힘을 빼고 평안함을 즐기면 된다. 가인과 아벨의 질투, 에서와 야곱의 줄다리기는 없다. 이런 곳이 천국이 안되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나? ‘침묵은 오늘날 유일하게도 아무런 효용성도 없는 현상이다. 침묵은 오늘날의 효용의 세계에서는 맞지 않는다. 침묵은 다만 존재할 뿐 아무런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침묵은 이용할 수가 없다.’(막스 피카트르)

김창호|입가에는 웃음을 터트리며 기쁨을 누리고, 눈가에는 눈물을 담고 이웃에 아픔에 공감하며 살고 싶은 사람. 본명보다는 ‘짱오’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주중에는 ‘대학로 동숭’에서 젊은이들을 만나고 있고, 쉬는 날에는 ‘광나루 상담나라’에서 놀듯이 공부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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