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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한페이지 단편 소설

은근히 나를 갈구는 상사의 비밀

뭐, 직장생활 10년 차에 별의 별 경험을 다 해봤지만 제일 견디기 힘든 건 일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다. 일이 많으면 밤새면 되고 서툰 일은 눈치코치 배워가면서 해내면 되는데, 상사 눈에 잘못나면 그 상사가 다른 부서로 가거나 잘리기 전까지는 아… 힘든 날들이 계속 되는 것이다. 나와 김부장과 악연은 3년 전 쯤으로 올라간다. 업무상 외국에서 전송되는 서류를 처리해야 할 때가 많은데 김부장이 잘못 읽은 단어를 ‘그게 아니라...’ 로 시작해 정확한 발음을 말해준 것이 시작이었다. 역시, 잘난 척은 금물이다. 회사에서는 아는 척도 조심해야 한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몇 가지 비결을 깜빡해 버린 것이다.
이후로 김부장은 은근히 나를 갈구기 시작했다. 이런 건 김민정 씨가 잘 알겠네, 로 시작한 엄청난 해외 서류를 떠맡기는 것은 기본이요, 술자리에서도 은근히 나를 경계하며 새파란 신입 여성들과 시시덕거리는 것이다. 마치 저렇게 나이 먹어 노처녀로 회사에 남으면 안돼 라고 속삭이듯이. 뭐, 날 때린다거나 모함한 적은 없으니까 넘어가주자고 맘 편하게 먹으면 되지만 매일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나는 매일매일 눈에 뭔가가 밟히고 느끼한 걸 먹어 소화되지 않는 기분으로 회사를 다녔다. 그런데 … 어느 날 은근히 나를 갈구는 김부장과 모든 트러블이 한꺼번에 풀리는 일이 생겼는데...

문제의 발단은 회의실이었다. 김부장과 단 둘이 논의할 것이 있었는데 화장실을 간 사이 그의 핸드폰이 울린 것이다. 테이블에서 진동으로 울리는 폰을 받을까 말까 하다가 에엣 하면서 받았다. ‘여보세요’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쪽에서 먼저 말을 했다.
“당신 회사 맞은편 커피숍에 있어. 지금 당장 안 나오면 회사로 갈 테니 그럴 줄 알아.”
그리고 딸깍 하고는 전화가 끊겼다. 목소리는 20대 후반의 여성. 이렇게 저렇게 보나 김부장의 숨겨놓은 애인인 것이 분명했다. 하하. 특종특종! 그 느글느글한 김부장이 어린 애인과 다툰 것이라는 나만의 결론을 내렸다. 다시 회의실로 돌아온 김부장. 나는 그의 핸드폰을 잡고 바이바이 하는 것처럼 흔들었다.
“아주 급한 사정이 있는 예쁜 여자 분이, 요 앞에서 김부장님을 기다린대요.”

그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전화기를 뺏고, 문을 쾅 닫으며 나갔다. 나는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뭐야 이사람, 사장님이라도 나타나면 뭐라고 변명하라고! 못살아. 다행히 별 탈 없이 퇴근시간이 되었고 김부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거 뭐야, 한낮의 정사라도 치룬 걸까. 한 시간쯤 그를 기다리다가 그냥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내차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그의 하얀색 렉서스가 보였다. 짙게 선팅해 놓은 차 안에 검은 그림자가 있다. 틀림 없이 누가 있다! 뚜벅뚜벅 차로 걸어가니 김부장이 운전석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툭툭하고 쳤다. 그는 흘끔하며 나를 쳐다보더니 미러를 내렸다.

참으로 가관인 것이, 나이가 50이 넘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표정이란... 하하하, 웃어줘야 했으나 왠지 측은한 기분이 들어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 한 잔 어때요? 이래뵈도 연애는 제대로 못해도 연애 상담은 박사라구요.”
김부장은 조수석을 딸깍 하고 열어주며 시동을 켰다. 여전히 성미가 급하군.

......

일을 하는 건 어차피 사람이다. 아무리 이윤을 위해서 냉철하게 일을 해야 하는 곳에서도 그 일을 하는 건 언제나 불완전한 사람인 것이다. 일에서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업무로 가치를 판단하는 경우가 있는데, 일을 지지리도 못하는 사람이 알고 보면 꽤 괜찮은 사람인 경우도 있고, 반대인 경우도 있고, 같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물론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아무튼 그 날, 나는 김부장의 아주 개인적이고 불완전한 부분에 대해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그 이야기는 한마디도 해줄 수 없다. 사실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 날 이후, 김부장이 그 여자와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는 여전히 날 갈구었지만, 나는 예전처럼 그것이 불쾌하지 않았다. 업무적으로 심한 일을 시키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매사에 완벽한 일처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나 이외의 모든 부하직원도 혀를 내밀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가 더 이상 밉지는 않다.

왜일까...

서진|소설가, 한페이지 단편소설(일명, 한단설 1pagestory.com) 운영자.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1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 에세이와 소설을 결합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출간. 세상의 가장 큰 의문을 풀 책을 찾아 헤매는 북원더러Book Wanderer 3nightson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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