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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한페이지 단편 소설

한밤의 대리운전

김씨가 호출을 받고 도착한 곳은 서면 한복판에 있는 대형 호텔이었다. 그날따라 손님이 적어 술에 취 해 반말을 하거나 행패를 부리는 손님이라도 기꺼이 태우고 어디든지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손님을 찾을 수 없을까봐 늘 전전긍긍하지만 이번엔 어렵지 않았다. 새벽 두 시의 호텔 로비에는 단 한 사람밖 에 앉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아 봤자 30대 중반, 한밤중인데도 선글라스를 낀 여자. 그녀가 고개 를 끄덕거리자, 김씨는 재빨리 달려가 수트케이스를 집어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주차장에는 뚜걱뚜걱 하이힐 소리와 수트케이스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묵직한 자동차 열 쇠를 받으며 김씨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 잠자는 사자처럼 떡 하니 놓여 있는 것은 벤틀리. 사업 실패로 넘어간 그의 신형 소나타를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감처럼 느낄 정도로 크고 당당 했다. 전면부에 달린 커다란 그릴과 동그란 두 개의 조명등에 감탄하며 이 차를 운전하는 데 자신이 돈 을 지불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집이 넘어갔어도 차를 마지막까지 팔지 않은 것은, 자동차를 자신의 분신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대리운전을 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리는 것도 매번 차를 바꿔 타기 때문일지 모른다.
수트케이스를 트렁크에 넣고,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여자는 남의 시중을 받는 것이 익숙한 듯 차 안으로 미끄러졌다. 김씨는 시동을 걸었다. 생전 들어본 적이 없는 낮고 육중한 엔진 소리에 넋이 나가 있을 때 여자는 목적지를 말했다. 해운대에 있는 최고급 아파트로, 층수가 너무 높아서,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스카이라인을 가린다고 해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곳이었다. 사실은 그곳에 살 수 없기 때문에 시기 질투가 난 것뿐이다.

김씨가 차를 몰기 시작한다. 그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로에 나서자 홍해가 갈라지듯 다른 자동차들이 옆으로 비켜났다. 천천히,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마치 김씨는 자신이 그 차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러다 흘끔 룸미러를 쳐다보니 여자는 피곤한 듯 뒷좌석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자신보다 스무 해는 젊은 것 같은 저 여자는 어떻게 해서 이 차의 주인이 되었을까? 우쭐해졌던 마음은 이내 초라해졌다. 광안대교를 타고 해운대로 향하며 바다 위의 다리가 좀 더 길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리를 건넌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차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짐 좀 들어주실래요?”
차가 정차하자 여자가 자동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아, 네.”
김씨는 수트케이스를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는 잠시 자리에서 멈췄다. 주차장에는 잡지에서만 보던 수입차 다섯 대가 잠을 자고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사진을 찍을까도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여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대리 운전비가 얼마인지 묻지 않고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주었다. 김씨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심하게 허리를 굽힐 뿐이었다.
바깥에는 바람이 꽤나 쌀쌀하게 불어왔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고, 바닷바람이라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는 광안대교를 바라보며 담배 한 대를 피웠다. 아주 길고, 깊게. 여자가 사는 아파트를 올려다보니 고개가 꺾일 지경이었다. 문득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졸린 목소리로 아내는 전화를 받았다. 혹시 사고가 나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아내를 안심시키고 그는 나지막이 자신이 태운 손님과 자동차에 대해서, 멋진 아파트에 대해서, 주차장에 서있던 자동차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처음엔 신이 났지만 끝에는 약간 슬퍼졌다. 모든 빚을 갚고, 집을 사고, 차를 사려면 몇 년이 흘러야 할까? 죽기 전에는 가능할 걸까?
“씨잘떼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집에 온나!”
아내는 전화를 퉁명스레 끊어 버렸다. 그녀가 마지막 손님이었다. 업체의 봉고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 오니 새벽 다섯 시. 엘리베이터도 없는 지저분한 연립 주택의 5층까지 힘겹게 올라갔다. 열쇠로 문을 여니 희미하게 좋은 냄새가 방 안을 떠다니고 있었다. 식탁엔 불이 켜 있고 자그마한 식탁보가 보였다. 김씨는 식탁포를 슬며시 열어본다.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김치찌개. 유난히 두툼한 돼지고기와 보드라운 두부도 보인다. 찌개 냄비 옆에는 그가 냉장고에 남겨둔 소주 반병과 빈 소주잔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진|소설가, 한페이지 단편소설(일명, 한단설 1pagestory.com ) 운영자.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1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 에세이와 소설을 결합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출간. 세상의 가장 큰 의문을 풀 책을 찾아 헤매는 북원더러 Book Wanderer, 3nightsonly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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