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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죽음의 의미를 묻다

전통적으로 죽음은 인간이 다루어야 할 영역이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하여 사람의 죽고 사는 일은 하늘의 뜻이라 여기며 살았다. 서양에서는 히포크라테스 이후 의료인들의 책무를 규정함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을 건강하게 돌보고 질병에서 낫게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해를 끼치는 행위는 금기시했다. 이런 전통은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사회가 지켜온 보편적인 생명윤리의 원칙 “생명에 해악을 끼치지 말라”는 규범을 낳았다. 이런 규범은 성서적으로 본다면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원칙과 갈등하지 않는다.

생명의 문제 앞에서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생명에 대한 해악인가?’에 대한 생명의료윤리학적인 논쟁은 생명과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복잡해졌다.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서 생명에 대한 인위적인 개입이 잦아진 까닭이다. 외양을 바꾸는 성형수술은 이제 보편화 되었고, 장기이식을 통한 새 생명 얻기 운동도, 이전에는 생각도 못할 일이지만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다. 그런가하면 생명복제, 줄기세포 치료목적의 연구 등 현대 생명 공학적 목적과 방법이 기존의 생명윤리와 갈등하기도 한다. 불치의 병 치료를 위하여 인간 생명의 초기단계인 배아를 조작 파괴하고 이용해도 좋은지, 인공수정을 위하여 다수의 수정란을 만들고 잔여 배아를 파괴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은지, 혹은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무한정 연장하는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인지 등의 물음들이 현대 생명윤리학의 영역에서 제기되고 있다. 존엄사 논쟁은 이런 논의의 연장에서 특히 불치의 말기환자들이 원하지 않는 치료를 거부할 권리를 주장하는 데에서 야기되었다.
극심한 신체 및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말기환자들의 경우 생명의 연장이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고통의 연장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환자들이 불필요한 치료를 거부하고 편안한 죽음을 수용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런 주장을 법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나라는 현재 네덜란드이며 미국의 오리건 주, 워싱턴 주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소위 존엄사를 사회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무자비한 생명연장, 존엄한 죽음
지난 5월, 연세대학병원의 한 환자 가족들이 제기한 “인위적인 생명유지장치의 제거를 허락하라”는 소송을 대법원이 지지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존엄사) 논의가 시작되었다. 몇 년 전 보라매 병원 사건의 경우 생명보조장치의 제거행위를 했던 의료진을 살인 행위로 여겨 기소했던 것에 비한다면 법원이 이제는 동일한 행위를 기소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일종의 의료적 조치로 보겠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 판결은 소생의 희망이 없는 이에게 생명연장조치가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거나 생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판단을 내포하는 것이다. 현대 기술과학의 개입은 생명을 지키고 연장하는 일은 할 수 있지만, 그 생명의 의미까지 부여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생명의 의미는신학적이며, 생명 윤리학적인 논의를 필요로 한
다. 비록 소극적이지만
존엄사를 법원에서 승인한 것은 무자비한 생명연장을 기하려는 의료적인 조치를 거부할 수 있는 환자나 가족의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이런 현실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언젠가 우리 자신의 죽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수용해야 할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언젠가 믿음 안에서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생명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받아들 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존엄사의 본질을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충구|감리교 신학대학교 기독교 윤리학 교수, 인권과 평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있다. 존엄사를 비롯하여 생명윤리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 <한국사회와 기독교 윤리>, <생명복제 생명윤리>,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