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FE/편집장의 편지

카페, 그 치명적 유혹

“흑, 스타벅스가 그립다!” 아이를 키우느라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 친구와 통화를 하던 중, 긴 탄식과 함께 수화기 저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굳이 스타벅스표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바람이라기보다는 스타벅스가 상징하는 ‘카페’라는 공간, 그 여유로운 커피 한잔의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뜻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커피야 마음만 먹으면 집에서도 마실 수 있지만 ‘카페’는 커피를 완벽하게 완성시키는, 집에서는 재현할 수 없는 ‘문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공간, 그 이상의 문화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으며, 우리의 일상은 이미 카페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책 한권을 들고 홀로 커피를 마시거나 삼삼오오 세미나와 스터디 모임을 열고, 카페를 아예 사무실 삼아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는 모습 등은 이미 익숙한 풍경. 번역 일을 하는 어느 프리랜서는 택배조차 카페에서 받기도 한다니, 가히 카페전성시대다. 카페는 홀로이기를 원하면서도 홀로이고 싶지 않은, 아무에게도 간섭 받지 않기를 원하면서도 나를 이해해줄 누군가가 필요한 현대인들의 모순된 욕망과 만나는 지점에 서 있다. 구속과 자유, 소속과 일탈, 고립과 소통의 경계에서 카페라는 공간은 사람을 위로하고, 영혼을 촉촉이 적시는 장이 된다. 커피중독 하나쯤은 있어도 된다고 스스로 커피를 허락하며 즐겨왔던 나는 3년 전 어느 여름날, 광화문의 카페 ‘커피스트’에서 핸드드립 탄자니아 커피 한잔을 우연히 만났고, 거부할 수 없는 그 검은 유혹에 충격을 받았다. 지금껏 마셔왔던 커피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가 환히 열리던 순간이었다. 이후 곳곳의 핸드드립 카페들을 순례하면서 카페와의 새로운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 즈음, 나와 마찬가지로 스타벅스나 커피빈 등 대형 체인점 카페의 똑같은 인테리어, 똑같은 커피 맛에 슬슬 매력을 잃어가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었고, 이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콘셉트로 ‘작은 카페’의 아름다운 탄생을 이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작은 카페는 동네의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실력 있는 아티스트들의 작은 공연과 전시, 동네 주민들을 위한 영화 상영 등 커피와 예술, 문화를 동시에 나누는 공간으로써, 커피 마실 곳 하나 없 었던 일상의 동네를 다채로운 문화적 감수성으로 물들이고 있다.
맥루한의 말처럼 예수님 자신이 곧 예수님의 메시지이듯, 지금은 매체가 곧 메시지인 시대이다. 매체를 ‘바탕’이라 하고, 메시지를 바탕에 담는 ‘형상’이라고 할 때에, 바탕에 따라 형상에 모아지는 집중과 흡수는 다르다. 즉, 바탕이 형상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며, 이 바탕이 곧 형상이라는 것. 똑같은 내용이라도 그것을 흑백의 바탕에 담느냐, 컬러의 바탕에 담느냐에 따라 그 형상은 완전히 다르게 흡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어떤 바탕인지보다도, 어떤 형상인지가 더 중요하기도 했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본질적이라는 견해에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메시지, 즉 형상이 소통되기 위해서는 어떤 매체, 어떤 바탕에 있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 바탕이 오히려 형상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장(場)이자, 공간이며, 그런 점에서 카페란, 새로운 소통의 문화 형상을 담아내기에 매력적인 바탕이 된다.
이번 마감에도 어김없이 노트북을 들고 카페를 찾는다. 로스팅 커피향이 가득한 카페에서 진한 케냐 커피 한잔에 빠지고 나면, 주변 사람들의 다소 시끄러운 수다마저 저 멀리 퍼지는 음악처럼 아른거리곤 하니, 사무실이나 집에서는 써지지 않던 글이 술술 풀리는 것은 어쩌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누군가 카페를 바꾸느니, 종교를 바꾸는 편이 낫다고 했던가. 하루의 대부분을 카페에서 보냈다던 사르트르와 보부와르. 말과 글, 커피와 삶을 나누었던 그들의 치명적 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운 가을이다. 나는 지금도 내 소통의 피를 뜨겁게 하는 바탕, 카페에 앉아 있다.

편집장 노영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