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FE/편집장의 편지

하루를 천년 같이

“1살 걸음마가 늦으면 지는 걸까? 8살 반장이 못 되면 지는 걸까? 26살 대기업 못 가면 지는 걸까? 34살 외제차를 못 타면 지는 걸까? 왜, 남의 생각, 남의 기준으로 살까? 생각대로 해. 그게 답이야.” 최근 눈길을 끌었던 어느 통신회사의 ‘생각대로 해’ 시리즈 광고이다. 우리 사회의 ‘나이’가 생물학적인 나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삶의 수순’을 표준화시켜 평가하는 잣대로 나이가 소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의 관습대로, 가정의 공식대로, 남들의 기준대로, 이 나이 즈음에 그정도 해야 된다는 틀은 매우 견고하여 이를 벗어나기라도 하면 곧장 ‘개성파’, ‘이단아’, ‘괴짜’ 등의 꼬리표가 따라 붙게 마련이다. 개인의 다양한 삶의 사연과 자율적 선택을 존중하기보다는, 오히려 남들과 다르게 사는 삶을 불안하게 여기도록 부추기는가 하면, 이미 형성된 각종 집단으로부터 소외시키기까지 한다. ‘생각대로’ 살기에는 감당해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과연 나는 ‘생각대로’ 살아왔을까. 돌아보면 나의 20대는 일찍 철이 들어버려 젊음이 주는 면죄부도 받아보지 못한 채, 너무 모범적으로만 살아온 시간이었다. 내 안의 하늘거리는 욕망은 매번 외면당했고, 그래선지 끝도 알 수 없는 우울과 꽤 친하게 지냈던 시간. 그때는 내가 다 컸다고 생각했더랬다, 우습게도. 스스로를 잘 안다고 자만하며, 힘겨운 선택의 고비마다 나에게 양보와 배려를 요구했다. 좀 더 이기적이고, 좀 더 나만 생각해도 되는 때였는데, 하는 후회와 아쉬움은 20대 후반, 이제 곧 서른을 맞이 하며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뭐랄까, 젊음에 대한 일종의 시한부 선고 같은 것이었다. 싱그러움의 청춘이 퇴색되고 증발되어 버리기 시작하는 때 같은 것. 그래선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는 그때 아니면 끄덕일 수 없는, 공감지수 별 다섯 개다. 머물러만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내가 떠나보낸 것도,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하며 비어가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은 꼭 서른 즈음에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물론 좀 더 살아보니, 그 절망조차 낭만이고, 이별은 순리이며, 인생이란 워낙에 그런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말이다.
30대를 지나면서 비로소 나 자신을 만나고 이제야 구원을 얻게 된 때, 이제 좀 솔직해져도 괜찮은 나이 아닐까, 싶었다. 지금껏 살아온 나를 칭찬하고, 앞으로 살아갈 나를 다시 격려해줄 때라고, 지난 세월 못 들은 척 했던 가슴 속 진실의 소리를 깨워 나를 달래줄 수 있어야 한다고. 너무 일찍 철 든 한을 푼다고나 할까. 지금의 서른다섯은 이 모든 것을 꽤나 아프지 않게 잘 해낼 수 있는 나이인 듯싶다. 다가올 나의 사십대는 어떠할까. 삶과 사랑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고, 조금 더 놓게 되고, 조금 더 자유로워질까. 그런데 문득 김형경의 <사람풍경> ‘작가의 말’을 읽다가 순간, 쿵 했다. “얘, 난 마흔이 넘어도 마음이 이럴 줄 몰랐어.”
대학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작가는 ‘이럴’의 의미를 한순간에 확연히 공감했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단다. “얘, 나는 예순이 되어도 마음이 그럴 거라는 사실이 더 그래.” 아, 마흔이 넘어도 마음이 그렇다니. 아니, 평생 그럴 거라니. 작가는 그 ‘마음’ 때문에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김연수는 소설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 마흔세 살이라는 나이는 ‘반환점을 돌아서 얼마간 그 동안 그랬듯이 열심히 뛰어가다가 문득, 이 길이 언젠가 한번 와본 길이라는 걸, 지금까지 온 만큼 다시 달려가야 이 모든 게 끝나리라는 걸 깨닫게 되는’ 때라 했다. 서른 즈음을 밟아올 때와 같이, 마흔 고개를 넘어가는 길도 그리 수월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살아가는 내내 평생 ‘마음’이 그렇다면, 마냥 흘러가는 시간의 물결에 몸을 내맡기면서 마음이 그렇지 않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분이 말씀하시는 ‘나만의 때’를 살아내고 싶다. 그래야 반환점을 지나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허무’가 곧 찾아온대도, ‘크로노스’의 절망 위에 다시 ‘카이로스’의 은혜가 피어나 천년 같은 고통은 하루처럼 지나가고, 하루 같은 감격은 천년처럼 남을 테니. 그때 비로소 나이로부터 가장 자유로우며, 가장 그 나이답게 살게 되는 것 아닐까. 이제 누구나 새로운 한 살을 먹는다. 생일 케이크에 꽂히는 촛불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그 모든 불꽃을 태우며 ‘생각대로’ 하루를 천년 같이 살아온 자신의 삶을 진심으로 경축할 수 있기를, 부디.

편집장 노영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