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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편집장의 편지

굿바이

모카포트로만 에스프레소를 내려주는 카페는 커피머신의 소음으로부터 자유롭고, 흐르는 음악의 선율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커피 외에 고요함이 절실할 때 제격인 곳이다. 작년 가을, 그 카페에 앉아 최영미의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라는 산문집을 읽고 있을 때였다. 중얼거리듯 무언가 내뱉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고 순간, 책을 향해 있던 내 몸의 더듬이는 그 음악을 향해 단숨에 달려갔다. 처음 대하는 낯선 무언가가 문신 새기듯 흔적을 남기는 것 같았다. 그 노래는 ‘뇌태풍’이라는 그룹의 ‘너무 많은 너무 적은’이라는 노래였는데, 가사가 이렇다. ‘너무 많은 말들 너무 없는 대화, 너무 많은 고백 너무 적은 침묵, 너무 많은 기록 너무 얇은 기억, 너무 많은 사랑 너무 없는 사람, 너무 많은 내일 너무 적은 오늘…’. 그 중 ‘너무 커진 교회 너무 작은 예수’를 읊조리는 부분에서는 몽환적인 여성의 음색이 그토록 날선 칼과 같이 느껴질 수가 없었다. 노래 하나에 갑자기 습격을 당한 듯한 느낌. 책을 읽으러 갔다가는, 책 제목마냥 길을 잃고 노래에 꽂혀 나온 날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너무 많이 가졌고, 무엇을 너무 많이 놓치고 있는 걸까 삶의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어김없이 찾아온 사순절 기간이다. 40일 특별새벽기도와 금식 등으로 점철된 사순절의 전형적인 모습은 어쩐지 습관적이 되기 쉽고, 그 내용은 빈곤하다. 예수가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이 시간, 우리는 얼마나 일상에서 진정한 사순절의 정신과 만나며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너무 많은 금식 너무 적은 진심, 너무 많은 기도 너무 적은 실천, 너무 많은 소비 너무적은 절약…’등의 가사로 이 사순절의 삶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형식적인 금식을 하기보다는, 그동안 당연하게 누리고 소비해왔던 자본과 물질의 권력을 떠나 생태적으로 느리게 살기를 선택해보는, ‘문화금식’의 삶을 사는 것은 어떨까. 너무 많아서 우리에게 익숙한 그것과 결별해보고, 너무 적어서 부족한 그것과 친해져 보는 시간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TV와 핸드폰, 인터넷 등에 사용하는 시간 대신 책을 보거나 대화를 하고, 홈쇼핑이나 대형마트에서의 소비 대신 생협이나 재래시장을 이용해 보는 일 등, 일상을 차지하는 기계적이고도 소비적인 자신만의 습관과 결별해보는 거다. 이때 결별이란, 단순한 분리와 헤어짐을 뜻하는 ‘이별’의 차원을 넘어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 이별의 인사를 나눔’의 뜻을 지닌 ‘작별’의 헤어짐일 수 있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헤어짐과 수동적인 분리를 ‘이별’이라고 한다면, ‘작별’은 보다 적극적인 헤어짐이고, 이별을 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행위이며, 무엇보다도 ‘인사’를 한다는 점에서 이별과 다른 것이다. 생이라는 것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의 연속이라고 할 때 ‘잘’ 헤어지는 일, 즉 ‘굿바이’는 참 눈물나게 어려우면서도 매우 중요한 삶의 숙제일는지 모른다. 떠밀려서 떠나고 억지로 보내는 것이 아닌, 굿바이 하며 스스로 떠나고 기꺼이 보내줄 아는 주체적인 작별의 ‘문화금식’ 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나 또한 7년 전 객원기자 시절부터 함께했던 <오늘>과 이별의 인사를 나누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경계’, ‘다리’, ‘틈’, ‘사이’, 이런 단어들을 영혼에 품으며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그곳이라고, 바로 거기서 작지만 의미 있는 소통을 나누고 싶다는 꿈으로 여기까지 왔다. 인터뷰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때로는 고통스럽게 글로 풀어내며, 그들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그리 살고 싶다는 강한 열망으로, 어쩌면 ‘사심’이 가득한지도 모르는 <오늘>을 만들어왔다. 이제 그들의 여정을 글로 쓰는 것이 아닌, 나의 여정을 비로소 살아내고 싶다. 나의 단어들을 다시 확인하면서. 그동안 나와 찐한 연애를 하며 내 삶에 단단한 용기를 선물했던 <오늘>. 못 다한 고백이 세상과 당당히 만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이즈음, 내 안에 머물고 노는 신과 만나며, 떠남과 방랑, 그리고 머무름의 새로운 여행을 떠나려 한다. 감히, 길을 잃기 위하여 <오늘>과 작별하는 이 순간, 앞으로 더욱 새로워질 <오늘>을 기대하며 깊은 포옹과 뜨거운 눈맞춤으로, 손 흔들며 환히 웃어주고 싶다. 굿바이.

편집장 노영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