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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사람과 사람

슬픔을 견뎌내게 하는 것은, 이야기 ㅣ 소설가 김연수

문학상에도 다관왕이 있다면 소설가 김연수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동서문학상(2001), 동인문학상(2003), 대산문학상(2005), 황순원문학상(2007), 이상문학상대상(2009) 등 국내의 굵직한 문학상을 모두 휩쓴 그의 소설은 대중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거의 매년 한 권의 소설책을 발표하는 부지런함을 보이는 그는 국내에서는 드물게 3~4만의 고정 독자를 보유한 인기작가로 꼽힌다. 김연수의 소설에는 인문학적 지식과 서정 시인의 감성이 공존하는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에서는 소통의 희망이 감지된다. 소통이 부재한 시대에 소통의 희망을 탐험하는 작가 김연수를 만났다. 글 이재윤 | 사진 노영신


무서운 건, 슬픈 게 아니라 외로운 것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카페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왠지 여성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실제로 자신의 작품에는 여성화자가 많이 등장하여 여성작가로 오해 받는 경우가 많다며 맞장구를 친다. “예전엔 잘 몰랐는데 여성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되게 좋은 것 같아요. 여성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계속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저도 소설을 쓰면 쓸수록 수다스러워지고 시시콜콜해져요. 목적지향적인 글이 아니라 과정을 중요시하면서 글이 좀 더 여성스런 쪽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김연수의 글을 해설하며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라는 문장을 인용하였다. 김연수의 소설에는 슬픔의 정서가 지배적이다. 최근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 만날 수 있는 단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는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는 화자가 등장하며, <내겐 휴가가 필요해>에서는 학생을 물고문하여 죽게 한 대공 담당형사의 비극이 담겨 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에요. 하지만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인 것 같아요.” 인간은 공감하는 동물이라고 했을 때, 슬픔이라는 감정이 제일 공감하기 쉬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아마 슬픔 쪽으로 집중되는 거 같다고 말한다. “슬픔이 나쁜 감정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혼자 화장실에서 우는 건 좀 안 좋다고 생각하지만(웃음). 같이 운다는 건 좋은 감정인 거 같아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로마서 구절이 떠오른다. 어릴 때 성당에 다녔다는 그는 지금은 미사에 가지 않는 ‘냉담한 신자’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 슬픔을 견뎌내게 하는 그의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실 무서운 건 슬픈 게 아니고, 외로운 거예요. 그게 고통이죠.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생각이요. 하지만 혹 비슷한 상황의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곧 그 과정 속에서 서로 위로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 슬픔이란 견뎌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외로움이 계속 있는 한, 슬픔은 곧 고통이지 않을까요.”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나의 결론은 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모든 게 달라졌으리라는 것이었다. 사랑은 입술이고 라디오고 거대한 책이므로.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건네므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입술을 빌려 하는 말은, 바로 지금 여기가 내가살아가야 할 세계라는 것이므로.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아름답게, 이토록 아름답게 연결되므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사랑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을, 오직 존재하는 것은 서로 닿는 입술의, 그 손길의, 살갗의, 그 몸의 움직임뿐이라는 것을 그도 알았더라면.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중에서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생각이요.
하지만 혹 비슷한 상황의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곧 그 과정 속에서 서로 위로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 슬픔이란 견뎌질 수 있는 것 같아요.



마지막 문장을 쓰기 전에 미리 알았죠. 내가 정말 멋진 걸 쓰겠구나. 마치고 나서 상쾌한 기분에 혼자서 막 춤도 덩실덩실 추었어요.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벌거벗은 봉우리의 고통과 슬픔과 절망 속으로 걸어간다.낯익은 얼굴처럼 환하게 웃는 암벽, 훈훈한 바람을 뿜어내는 설산, 서서히 그를 위쪽으로 밀어올리는 바람. 그리고 벌거벗은 산으로 붉은 꽃과 푸른 풀과 하얀 샘이 생겨난다. 그는 자신과 함께 걸어가는 검은 그림자의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껄껄거린다. 여기인가? 아니, 저기. 조금 더. 어디? 저기. 바로 저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 - 단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중에서


소설을 쓰면서 스스로를 좀 더 좋아하게 된 소설가
원래 천문학자가 꿈이었다고 하는 그는 소설을 쓰면서 삶의 변화를 경험했다고 한다.“ 전업으로 글을 써서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아니고. 문학상의 상금이 도움이 되기도 했죠. 동료작가들에게 주업이 수상자고 부업이 소설가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어요(웃음). 아직까지 소설 써서 얻게 되는 이득이 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잘 안 해 본 것 같아요. 제 소설이 판매부수 80만부 돌파로 뉴스에 나오면 되게 불편할 거 같고 창피할 거 같아요.” 돈이 되는 것만을 찾는 시대에 인간 내면의 성찰을 통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그는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그는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면 온갖 편견에 사로잡혀 세상을 비관하고 남의 핑계를 대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런데 소설을 쓰면서 변했단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스스로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강했지만, 지금은 나름 마음에 드는 부분이 생겼다고. 2009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쓸 때의 이야기다. “가
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데요, 동 틀 때 마지막 문장을 썼어요. 마지막 문장을 쓰기 전에 미리 알았죠. 내가 정말 멋진 걸 쓰겠구나. 마치고 나서 상쾌한 기분에 혼자서 막 춤도 덩실덩실 추었어요. 어느 순간에 그래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내 스스로가 마음에 들게 되었고, 그게 전적으로 소설 때문인 거 같아요.” 하지만 그가 말하는 소설쓰기가 그리 호락호락한 작업은 아니다. 치열한 전투와도 같은 고된 작업이다. 스스로 멋진 소설을 썼다고 자부할 만한 작품을 평생 하나 남기는 것도 힘들 것이라 말한다. “창작의 과정에서 보면, 소설쓰기는 발견에 더 가깝다고 봐요. 처음에 흐리멍텅한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을 점점 또렷이 발견해 가는 과정이죠. 글을 쓸 때 왜 그 사람이 거기 갔을까 생각하면서 6개월 걸릴 때도 있어요.” 1930년대 만주에서 벌어진 민생단사건을 배경으로 한 <밤은 노래한다>를 쓸 때는 연변에서 9개월을 기거하며 자료조사를 하기도 했다. 수집된 자료를 토대로 상상을 하는데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글이 안 써질 때는, 아주 통속적인 것들만 먼저 떠오르죠. 꽃 보고 웃는다던지, 달 보고 운다던지(웃음). 그런 유치한 것만 떠오르다가 이건 아니다, 다른 게 있을 거다, 라는 쪽으로 생각이 계속 바뀌어요. 제가 실패한 소설들이라고 얘기하는 소설들이 있는데, 정확하게 이게 이들의 삶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작품들인거 같아요.” 산고의 진통을 겪으며 좋은 소설을 세상에 내어 놓는 경험을 통해 이제는 좀 힘들다 싶을 때 비로소 좋은 글이 나오겠구나, 알게 된다고.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연결되고 싶다는 소통의 열망은 김연수 작품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초적인 에너지이다. “더 많은 이야기. 이제 내게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살아 있는 다른 사람의 체취가 그리워서 잠도 안 온다.”(<나는 유령작가입니다> 266쪽)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은 바로 자신만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김연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덕적 허무주의를 뛰어넘어 소통의 희망을 제시한다. 89학번인 그는 스스로를 운동권으로 치자면 끝물이라고 말한다. “어떤 확신에 찬 목소리에 대한 거부감이 굉장히 많아요. 제가 89학번으로서 젊었을 땐 운동권 안에 정부보다 더 심한집단주의가 있었고, 그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어요. 그런데 작년 촛불집회의 젊은 학생들을 보면서 왠지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은 대부분 이기적인데, 약간의 이타심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남자애들이 여자애들을 제치고 뒤로 막 도망가고…. 하하! 하지만 자발성 가운데 건강함을 볼 수 있었어요.”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걸 잊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김연수 작품의 매력이며, 그것이 김연수를 소통의 작가로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그는 관심이 가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했다. “주로 불행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있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이 굉장히 불행하게 살았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건, 제 쪽에서 생각하는 값싼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고통을 감싸 안은 이야기와 이야기가 연결되는 지점을 탐험하는 작업을 한다. 고통을 치유하는 소통. 그것이 바로 김연수의 소설들이 지닌 매력이다.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하니 새벽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마흔 명 남짓한 사람들이 종현의 생중계에 접속해 있었다. 택시 안의 풍경을 상상했는데, 뜻밖에도 작은 사각형 안으로 보이는 것은 불길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타오르는 어느 건물의 옥상이었다. 그 불길을 향해 여러 군데에서 물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편의점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온 동료들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오는 걸 보고 내가 화면을 끌때까지, 거기에는 타오르는 불꽃과 시커먼 연기와 아래에서 솟구치는 물줄기가 침묵의 공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날 새벽, 거기서 여섯 명의 사람들이 불에 타 죽었다는 건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 - 단편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중에서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 단편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에서



나이가 들면 소설 쓰는 게 힘들어지고 소설을 둘러싼 심사, 행사, 심지어 관직 등 주변의 것들이 재미있어 지는 법인데, 오로지 소설만 쓰고 있는 김 훈 선생이 존경스럽다는 작가 김연수. 자신도 역시 나이가 들어도, 혼신을 다하느라 너무 힘겹지만, 그래서 더욱 ‘재미있는’ 소설 쓰기를 멈추지 않고 싶단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은 스페인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라 귀띔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가서 신부가 되고, 귀국하려다 실패하여 죽게 되는 소년의 이야기라고. 오랫동안 숙성시키듯 이야기를 길어내는 그는 또 어떤 질문을 들고 가슴을 두드릴까. 슬픔의 밑바닥을 그리다가, 외로운 영혼들의 친구가 되었다가, 이윽고 공감의 희망을 선물하고 마는 김연수. 고통의 슬픔, 그것만으로 매듭을 짓기에는 그는 아직 낙관적이고, 그래서 그의 소설은 더 읽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