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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그 옛날 그리고 그곳, 나는 한국에 산다

하늘을 품고 땅을 안은 전주 한옥마을. 그 곳에는 태조로를 비롯해서 경기전길, 향교길, 최명희길, 은행나무길, 술도가길, 오목대길, 가리내길 등 이름마저 정겨운 낮은 담장 골목길들이 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싱그러운 봄바람에 살짝 몸을 얹어 걸음을 옮기다 보면 속살대는 저마다의 골목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멈춰 서 귀를 기울인다. 어릴 적 숨바꼭질 술래가 되어 골목길을 돌다 보면, 밥 먹으라고 소리치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를 일. 고즈넉이 시간도 멈추어 버린 듯한 그곳으로 단출하게 차려 입고 전주행 열차에 몸을 실어보자.
글·사진 김승환


온을 꿋꿋이 보듬어 간직한 처연한 아름다움

전주하면 ‘전주비빔밥’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마른입에 침이 구석구석 자리를 잡지만, 전주는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수도였고 조선왕조 500년간 깊은 역사를 꽃피운 곳이다. 또한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판소리의 고장이며, 질 좋은 종이를 만들었던 한지의 본가이며, 삶의 여유와 풍류가 넘치는 해학의 마을이다. 많은 수식어가 붙는 전주! 그곳에 모든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옥마을이 있다. 전주한옥마을의 역사는 아픔으로 시작됐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인들이 우리의 삶의 터전에 자리를 틀며 주인행세를 떠는 꼴이 사나워 그들의 주택을 벗어나 전통한옥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마을을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만들기 시작했다. 왜 이곳 한옥마을에 끌렸을까 하는 의문이 스르륵 풀리는 순간이다. 전통을 운위하는 일은 꽤나 매력적인 일이다. 하지만 처한 현대 문화에서 막연히 전통적 가치의 부재를 느끼며 보존해야 한다고만 외치고 싶지 않다. 전통의 아름다움 속에 담겨 있는 고통스런, 그렇지만 역사, 우리의 역사이기에. 이런 아픈 역사를 머금은 이 온고을에서 나는 또 어디에 서 있는지를 조용히 묵상해본다. 이렇게 고즈넉한 곳에서 아픔을 되새기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보게 했다. 팔달로와 태조로가 만나는 한옥마을의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전동성당, 왼쪽은 경기전, 뒤로는 풍남문을 만
날 수 있다. 전동성당은 조선시대 천주교인의 순교 터 위에 세워진 것인데 윤지층, 권상연 등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1908년 프랑스 신부 보두네가 성당 건립에 착수하여 1914년에 완공했다. 순교자가 느꼈을 아픔과 고뇌를 다 품어 줄만큼 포근하면서도 웅장하고 화려한 로마네스크 복고양식의 이 건물은 동서양의 문화가 함께 하는 이색적이고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뒤로 보이는 풍남문은 조선 초기에 수축한 것인데, 역시나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성벽과 성문이 사라지면서 이것만 남았다. 원래는 3층이었는데 현재는 2층 문루에 좌우로 단층 누각을 얹었다. 그래도 그 문의 위용은 전주의 명물이라 하기에 충분하리라. 그네들이 가져간 것이 많다는 씁쓸한 가슴을 남겨두고 경기전으로 발길을 돌린다. 경기전으로 가려면 태조로를 지나야 한다. 태조로 좌우에는 기와지붕을 머리로 한 전통가옥들이 즐비하다. 한약방과 기념품 가게, 찻집과 전시관들이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여느 흔한 관광지의 상투적인 제품은 아니어서 구경만 해도 꽤 좋다. 경기전에 앞에 당도하면 사자 두 마리가 한 비석을 등에 업고 있다. 이곳을 지나가는 누구든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하마비下馬碑가 오롯이 서 있다. 다름 아닌 경기전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셨기 때문이란다. 원래 전국에 다섯 군데 어용전을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모두 불타고 이곳 전주 경기전만 남아 있었다가 정유재란 때 이마저 소실됐으나 광해군이 복원해 오늘에 이르렀다.



역사의 울림을 느끼는 감격
경기전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서다가 <혼불>의 최명희 문학관을 만났다. 그녀의 생가는 사라졌지만 ‘최명희길’을 조성하고 2006년에 문학관을 열어 작가의 삶과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 두었다. 일제 강점기에 남원을 배경으로 종갓집 종부 3대가 겪는 삶의 역정을 한자한자 담아낸 <혼불>의 엄청난 양의 원고지 뭉치들을 마주하며, 시대의 문화적 전승의 전형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이곳에서 몸소 느껴볼 수 있다. 최명희 길을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손 이석씨가 거주하는 승광재를 만난다. 바로 옆은 설예원인데 전통 다례와 예법을 체험할 수 있다. 길게 늘어 선은행나무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한국음악체험의 교육관인 아세현과 전통차를 만들 수 있는 풍남헌도 볼 수 있다. 이런 고택들을 돌아보고 발품이 조금 팔렸다면, 여태껏 걸어온 길과 함께 서 있는 은행나무 앞에 서서 딱딱한 껍데기에 부드러운 손을 대어 볼만 하다. 600년 동안 말없이 이곳의 모든 역사를 맞대고 서서 지금도 어김없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니. 나무가 나에게 말하는 듯하다. 자신과 접촉함으로 600년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그네들이 살았던 삶을 살아 보다
너무 한참 서 있었나 보다. 술도가길을 거쳐 공예공방촌 지담에서 한지 조명 등을 만들 수 있고 전주공예명인관에서 무형문화재의 작품들로 한지수의, 목공예, 생활소품을 구경할 수도 있다. 바로 옆 전통술박물관에서는 전통 가양주에 대한 다양한 유물과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다음 골목 전통한지원에서는 여전히 오래전 그 방식대로 한지를 만든다. 닥나무의 껍질을 벗겨 삶은 다음 곱게 매질하고 물에 풀어 채에 걸러 말리면 거칠면서도 따뜻한 우리네 한지가 된다. 한지를 만드는 공정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정말 후회할지도 모른다. 깊숙이 들어온 마을의 깊이에서 조금 벗어나 넓은 전경을 보고 싶다면 오목대로 가자. 그 위에서 한옥마을의 전경을 바라보니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전혀 다른 세상이 눈동자에 꽉 찬다.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와 단청의 조화가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를 마음의 한지에 그려낸다. 짐짓 사극의 주인공이 되어 호령도 해봄직하다. 한껏 폼을 내며 뒷짐을 지고 오목대길을 따라 내려가면 향교 수업을 마친 유생들이 생원과 진사 공부를 하던 양사재를 만난다. 이곳은 후에 호남 최초의 신교육이 시작된 전주초등학교의 효시로 불린다. 남천을 따라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한벽당이다. 승암산 기슭 절벽을 깎아 세운 한벽당은 이름처럼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혀 흩어지는 광경을 묘사하여 붙인이름인데 집현전 학자였던 월당 최담 선생이 세운 별장이다. 아래로 흐르는 전주천과 정면의 남고산을 바라보는 풍광은 한옥 마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절경 중 하나이다.


백제와 조선의 긴 역사를 그대로 껴안고 있으면서도 그곳 특유의 색다른 멋과 후미진 멋. 골목 구석구석에 잘 보존하고 있는 그때의 그것들을 돌아보는 쏠쏠한 재미는 퉁퉁 부운 발의 고통을 잊게 할 만하다. 사람들이 그곳에 있고, 그곳에 우리가 있고, 그 우리의 아픔과 즐거움 모두 품고 처연하면서도 당당히 서 있는 곳! 봄의 기운이 달아나기 전에 은행나무가 전하는 우리네 역사를 들어보지 않으련?

전주(온고을)한옥마을
전주시 완산구 교동. 풍남동 근처 대부분
tour.jeonju.go.kr
063)281-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