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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서낭당 예배당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아들 시험 잘 보게 해주시고, 우리 딸 시집 잘 가게 해 주시고, 우리 남편, 우리 아내 건강하게 해주시고, 남편 사업 잘되게 해주시고, 우리 가정 복 주시고, 좋은 직장 취직하게 해주시고, 신앙 있는 훌륭한 배우자 주시고, 아무쪼록 우리 집안 잘되게 해주세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기복신앙을 부르는 교회
휘영청 달 밝
은 밤에 물 한 그릇 떠놓고 손이 발이 되게 비는 기도, 흩날리는 천 조각이 너울너울 걸린 나무 밑에서 신령님께 비는기도, 무릎이 닳도록 부처님께 절하는기도, 그리고 우리가 교회에서 눈물 콧물 흘리며 드리는 그 기도(!). 모두 위의 기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교회든 주일 설교엔 ‘복’이 빠지지 않으며, 내 교회, 내 가정, 내 직장, 내 문제 모두 ‘나’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복을 기원하는 기복신앙을 가르치며 결국엔 기복이 심한(?) 신앙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이며, 신비이다. 하지만 나는, 또 우리는 내 말만 일방적으로 쏟아내고, 복을 달라며 하나님의 보좌를 쥐고 흔든다. 떼를 쓰고, 악악거리며 울다 지치면 그것으로 소위 기도의 양(?)을 다 채웠다 생각하며 집으로 산뜻하게 하산한다. 그러고 나서 내 맘대로 신나게 뛰어다니다가 엎어지고는 그게 하나님의 책임인양 다시 묻고 따지고 징징거린다. 심지어 내게 응당 와야 할 ‘복’을 왜 안 주냐며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속사포 랩을 쏘아 대기도 한다. 모노드라마가 따로 없다

예수님의 관심은 어디에
몽골의 대초
원에서 ‘나’는 점 하나에 불과한 인간이었다. 6・25 동란을 맞은 것 같은 가난한 다르항(몽골의 소도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매일의 일상 속에 ‘나’와 ‘내 문제’ 에 빠져 있던 것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마음의 울림은 얼마 되지 않아 거센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져 버렸고, 또 다시 ‘하나님, 내 문제를 해결해주세요…’로 되돌아왔다. 참으로 기복 심한 수십 년 경력 기복신앙의 힘이란! 인생의 대부분을 가난한 목수로,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맏아들 예수는 ‘내 문제’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았다. 끝없는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나서는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눴다. 그러고는 다시 힘을 얻어 수 많은 사람들 무리에 들어가 그들의 필요와 생각을 듣고 해결해주었다. 예수님이라고 자신의 문제가 없고, 먹고사는 것의 염려가 없었을까. 하지만 그는 하나님과 대화를 통해 ‘나’에 매몰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며 돌봄으로 나아갔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아니냐며. 또한 구제를 하되 대놓고 나팔 불지 말고,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기도를 할 때는 보이려 하지말고,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하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찬양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며,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오늘을 알차게 살 수 있는 기도를 알려주셨다.

진정 사랑한다면
언제까지 교회는 내
교회의 덩치를 불리고, 성도들의 성공과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를 가르칠 것인가. 성도는 그리고 또 나는 언제까지 내 문제에만 집착할 것인가. 기도는 하나님과 관계다. 사랑하는 사람이 날이면 날마다 뭘 달라고 징징댄다면 과연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제 그쯤 빌었으면 됐다. 지금 예수님의 관심은 내 사랑 고백에 닿아 있다. 서낭당 예배당이 아닌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주는 무엇이 아닌 그분만 갈망하는 예배당을 애타게 찾으시면서….

배성분|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내 안의 그분과 대화하며, 때론 나를 잃을지라도 이젠 사랑하고 싶다 꿈꿔보는 철딱서니 직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