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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책 읽는 마음

그늘에서 신을 진실히 마주하다│그늘 - 문학과 숨은 신, 김응교 문학에세이 1990-2012








그늘 - 문학과 숨은 신
김응교 문학에세이 1990-2012

김응교 | 새물결플러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매우 유감스럽지만, 이 책은 상당히 고약하다. 일단 어렵다. 어느 정도의 인문학적 소양을 쌓지 못한 사람에게 이 책은 물리적으로 무거울 것뿐 아니라 지적으로도 육중하다. 이를테면 전체 논의의 포석으로 깔린 라캉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들 - 주체, 대타자,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증상, 증환, 쥬이상스 등 - 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면, 십중팔구 라이트급의 독자가 헤비급의 저자를 상대하는 듯한 아찔하고 아득한 경험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쉽고 가벼운 독서로 지적 감량을 거듭하여 매끈하고 날렵한 몸매를 유지하는 라이트급의 우리 같은 독자들은 김응교 시인이 라캉과 지젝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의 저작을 통하여 우뚝 쌓아올린 정교한 관점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고산증으로 기진하거나, 장르와 시대, 동서양을 넘나들며 풀어내는 다채로운 텍스트의 풍요로운 해석을 따라잡지 못한 채 시차증으로 맥진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독자들이 안고 있는 위험은 사실상 김응교 시인의 의도에 따라오는 불가피한 결과다. 물론 그가 애초에 독자를 일부러 위험에 빠뜨리길 원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는 독자도 위험을 무릅쓰고 텍스트의 세계를 모험하는 것을 원했는지 모른다. 마치 저자이기 이전에 독자였던 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사실 헤비급 복서로 보였던 저자는 오랜 시간 슈퍼헤비급의 여러 지적 챔피언과 힘겨운 대결을 감내해온 독자였다. 그가 바라는 독서는 에세이스트 서경식의 말처럼 ‘도락이 아닌 사명’이며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 독서’다. 이를 통해 그는 궁극적으로 ‘삶이 책이 되는 경지’를 겨냥한다. 자신이 하나의 책이 되기를, ‘심비(心碑)에 새긴 글씨’가 되기를 욕망한다. 

하여 ‘김응교가 쓴 책’은 또는 ‘김응교’라는 책은 ‘문학에서 만난 숨은 신’에 대한 이야기다. 김응교가 말하는 숨은 신이란 “때때로 현존하고 때때로 부재하는 신이 아니라 현존하며 동시에 부재하는 신”이다. 그래서 그는 윤동주, 박두진, 이청준, C.S.루이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이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작가로 분류하는 작가만 아니라 유하, 박지원, 하루키 등 비기독교적 작가, 레비나스, 보드리야르, 아감벤, 바디우, 지라르, 스피박, 지젝 등 현대사상가를 통해서 ‘숨은 신’을 찾아내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 책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는 이와 하나님의 부재를 확언하는 이에게 잘 맞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숨은 신’이 가장 결핍된 사람들이기에, 틀림없이 ‘숨은 신’이 가장 필요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양극단의 사람들은 아마도 이 책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을 뿐더러 읽기를 거부할지도 모르겠다. ‘숨은 신’이란, 하나님의 부재를 믿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기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들이기에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스칼이 말했듯 ‘진실한 신은 숨은 신’이다. 우리는 성경이나 예배,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더는 찾지 못할 수도 있고, 거꾸로 고전이나 시, 소설, 영화 심지어 그다지 종교적으로 보이지 않는 작품에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김응교의 책처럼, 김응교라는 책처럼 좀 읽기 고약한 책이라도 읽어보는 고역을 한 번쯤은 감수해볼 만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라이트급인 우리가 모두 김응교 같은 헤비급의 저자로 거듭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그를 따라서 책을 읽으며 숨은 신을 만난다면, 그래서 거짓된 신이 아닌 진실한 신을 만난다면, 우리는 반드시 어떻게든 변할 것이다. 언젠가 우리도 누군가에겐 하나의 책으로 읽힐지 모르니. 글 이호은


문화매거진 오늘 9-10월호 두 손을 모으다

시로 세상과 사람을 말하다│김응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