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문학이 아니예요. 
시는 단순히 문학의 한 장르가 아니예요. 
시는 인간을 움직이는 에너지도 아니예요. 
인간 본성 깊이, 예술 이전에 이미 詩가 있어요.”

최근 고은 시인이 모 잡지에 쓴 시에 대한 김응교 시인의 평이다. 감성을 찬양하는 시대에 걸맞게 시는 영화 혹은 접하기 쉬운 책을 통해 한 발 더 곁으로 다가온 요즘이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온 것 같으면서도 시를 대할 때면 가끔은 먼 언어와 그들만의 세계처럼 동떨어져 저 멀리에 놓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단순히 문학의 언어로서가 아닌 삶의 언어로서 시를 쓰고, 시적 감성으로 세상을 거닐며 대중과 대화를 나누는 시인 김응교를 만났다. 글 · 사진 김준영

시인이시고, 동시에 문학 평론, 그리고 대중 강연, 인문학 강연, 연세대 신학과 출신이시기도 하고 꽤 흥미로운 이력을 지녔다 사실 저는 경계인입니다. 일본에서 13년을 살다 돌아 온 디아스포라이기도 합니다. 학위는 한국문학인데, 비교문화와 일본문학도 해야 했고, 와세다대학에서 강의도 그렇게 해야 했으니까요. 국경이 해체되거나 반대로 국경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이 시대에 저 같은 경계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인이면서도 바벨론에 속해 있는 다니엘처럼 말입니다. 경계인이라도 모두 좋은 것은 아니죠. 경계인들은 양쪽에 아첨할 수도 있고, 양쪽에서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요. 

어떻게 시를 알게 되었는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동시를 써서 잡지에 발표했던 적이 있습니다. “참외는 멋쟁이/노랑드레스가 이뻐요./ 내 동생과 내가 멋있다 하면 / 그 맛, 더욱 달지요” (‘참외’)라는 동시였어요. 자라면서 건축학도가 되고 싶어서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휴일이면 이젤을 들고 고궁에 가서 유화를 그리거나, 건축대상 받은 건물을 스케치 하면서 지냈어요. 그러다가 고3 때 갑자기 종교적 충격을 경험하고는 이과에서 문과로 옮겼고, 연세대 신학과에 들어갔습니다.
그 전 고등학생이었을 때 전도사로 계시던 시인 서성환 목사님(제주 사랑하는 교회)께서 제게 자작시집을 보여주고 그러셨어요. 그 때 처음 시를 알았습니다. 대학에 입학에서 제가 쓰는 글이 시인지도 모르고 써서는 집안 곳곳에 붙이고 철을 하고 그랬습니다. 같은 학번인 소설가 공지영씨가 문학회였는데, 제가 쓴 시를 보더니 <연세춘추>에 발표하라고 권해서 처음 발표한 것이 시를 쓰는 계기가 되었죠. 

시를 정식으로 공부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처음엔 혼자 썼지요. 그러다가 시창작론 시간에 들어갔는데 당시 국문과 교수님이 좋게 평가해주셨어요. 그 무렵 강은교 시인의 ‘우리가 물이 되어’ 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학교 다닐 당시 80년대는 시대적으로 방황을 많이 하게 하는 시기였지요. 개인적으로도 인생에 대한 물음이 많았는데 그 시를 읽고 ‘시가 사람을 살릴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감사하게도 시인으로서 좋은 멘토들을 만났지요. 1987년 도종환 시인의 추천으로 <분단시대>에 시를 발표하고, 1990년 <한길문학> 신인상을 고은 선생님께 받았어요. 1991년 평론 ‘풍자시, 약자의 리얼리즘’ 을 <실천문학>에 발표하면서, 평론 활동도 시작했습니다. 

시는 소설과 수필보다 저 멀리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는데 자기에게 맞는 시인을 찾는 것이 먼저이겠지요. 그리곤 시에 담겨 있는 언어로 대화하고, 그 시인이 점차 좋아지면 그 시인의 다른 작품을 접하고, 또 다른 시집을 벗하며 시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라는 장르의 서정성이라는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이 소수일지는 모르지만, 시의 서정성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고요. 
시의 서정성을 누리며 산다는 것은 행복한 삶이죠. 서정성은 곧 영혼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니까요. 더 풍성한 영성의 결을 지닐 수 있겠지요. 성경에서도 시는 꽤 중요한 장르이지요. 예수님은 시인이시기도 하셨고 주기도도 시의 형태를 지녔고, 산상수훈도 한 편의 시입니다. 우리나라 번역에서는 그게 살아 있지 않아 아쉽죠. 

보통 성경을 대할 때 문학적 요소를 많이 언급하거나 그 풍부함을 소개하지 않는 것 같다. 성경을 문학으로 읽어내지 못하는 한국 교회의 아픔이 아니겠나 성경은 글자로 쓰인 문학작품입니다. 잘 짜인 문학작품이라고 하기엔 이견이 있으나, 열왕기상하 같은 역사 소설 장르도 있고, 아가서, 잠언, 시편 등은 시집이고요. 욥기는 최초의 희곡집이지요. 예수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단편소설 양식이지요. 바울의 편지 서신은 초기 서간체 문학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죠. 
성경을 대할 때, 문학적 관점으로 대하지 않는 것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는 데 그리 좋은 접근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산과 들을 보면 아름답듯이, 성경을 문학작품으로 읽어도 아름답습니다. 목회자에게 필요한 여러 중요한 요소 중에서 다양한 문학의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와 그 문학적 텍스트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관한 공부도 필요하지요. 인문학은 그 지점에서 아주 좋은 훈련 도구이고요. 고전이면서 경전인 성경을 균형감 있게 읽어 내야죠. 

목회자 중에서도 요즘 인문학을 읽거나 조금 더 심도 깊은 연구를 하신 분들도 있는 걸로 안다 늦게나마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목사님들이 적지 않은 거 같아요. 목회자가 인문학과 고전을 읽지 못한 것은 목회자의 취직률과도 관계있을 거예요. 교회 당회장으로 자리 잡으려면, 목회에 도움되는 쪽에만 집중해서 석사, 박사 학위를 땁니다. 인문학을 대할 시간이 거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뒤늦게 공부하고 싶은데 기회를 만들지 못하지요. 혼자서 하기는 꽤 묵직하고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월요일마다 목사님들이 강의를 요청해 오기도 합니다. 

의미 있는 지점에 서 있다고 하겠다 다니엘은 엄청난 학문의 소유자였고, 요한도 철학에 능통했고, 바울은 그 스승들부터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들 중에 세상을 쉽게 이분화하는 이들이 있어요. 게다가 세속적인 것은 모두 죄악이라고 말하는 이들까지 있어요. 
예수님 자체가 당시의 문화 공간들을 잘 이용하셨죠. 일테면 사람이 잘 모이는 강가, 거리, 광야, 동네 마당, 결혼잔치자리 등 따지지 않고 가셨죠. 요즘 말로 하자면 카페 문화도 잘 이용한 것이겠죠. 제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세속적이라고 하는 그 곳에 ‘숨은 신(Hidden God)’ 의 의미를 알려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역할은 교회 안은 물론 교회 밖도 필요하다. 정말 경계인처럼 말이다 곧 <문학과 숨은 신>이라는 제목의 졸저가 곧 나오는데, 제 관심은 비신자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들과 대화하고 싶지요. 제가 주로 연구한 시인은 신동엽, 박두진, 이찬, 백석, 윤동주 다섯 분 정도입니다. 가장 깊이 있게 공부하고, 핵심적인 것을 깊이 있게 하되 깊이 있는 내용과 더불어 대중적 내용의 글을 같이 내고 싶습니다. <한일쿨투라>를 내고나서 좀 더 대중적인 글을 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이젠 내 작업의 주제일 것입니다. 윤동주, 백석 등도 학술논문으로 발표하는 동시에 대중적으로도 풀어내려고 합니다. 기독교의 이야기도, 세상을 향해 예수의 이야기도, 혹은 교회에 세상의 이야기도 좀 더 쉽고 잘 읽히는 이야기로 풀어내려고 합니다. 

문화에 대한 접근과 소통을 꾸준히 해오셨다. 그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문화는 어느 지점에 서 있을 수 있을까 기형도 시인이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우리 동네 목사님’) 한다고 썼었지요. 드러내지 않고도 삶으로 말하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스바냐 3장 17절 중 “잠잠히 사랑하시며”에서 문화의 방법론을 생각해 봅니다. 방법론이 ‘잠잠히’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시끄럽고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것은 기독교 문화의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기독교 문화가 점령과 전투적이지 않은가…, 집회에 유명한 대중가수 불러서 큰 돈 주고 찬양 몇 곡 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 문화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전면적인 삶의 문화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겠지요. 좀 더 조용히 말입니다. 

요즘은 사실의 진위를 떠나 시끄러움의 근원이 교회인 것 같아 안타깝다. 교회론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교회가 무엇일까? 저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몇몇 교회들이 과연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일까 생각하곤 해요. 그것이 기독교의 모습이라면 저는 그런 기독교인이 되고 싶지 않아요. 교회라는 개념 자체가 많이 오해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건물이 있고 주차장이 있어야 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교회를 백화점으로 생각하는 거겠죠. 예수님은 거리에서 광야에서 다락방 등에서 대중을 만나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멘트 건물로 자꾸만 가둡니다. 거기만 교회라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사실은 감옥도, 광야도, 거리도 교회지요. 빌립보에 있었던 바울에게 감옥이 예배당이었는데요. 
문학도 영문과 국문과 독문과 뭐 이렇게 나누는 것도 대학에서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서지 문학은 원래 문학 하나 아니겠어요. 그런 것처럼 복음은 하나이건만 자유주의니 복음주의니 에큐메니컬이니 나누는, 그런 논쟁에 저는 거리를 두는 편입니다. 그저 이 경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성전의 모습을 보며 분개하시고, 그것을 뒤엎으셨죠. 지금은 분노하지 않으실까요? 교회를 건물 밖으로 거리로 나서게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디옥교회도 해체가 되었기에 유럽에 기독교가 전해지고, 평양의 장대현교회도 해체 되어 오히려 거기서 흩어진 사람들이 남한에서 퍼졌잖아요. 과연 건물이 교회냐. 그곳이 교회라고 할 수 있냐. 재고가 필요하죠. 하나님은 부시고, 파괴하시며 사용하시죠. 

대중강연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작은 모임을 많이 하시는 것도 교회에 대한 관점 때문이겠다 그런가요? (웃음) 귀국해서 잠시 대중강연을 많이 하는 편인 거 같아요. 라캉도 대중들과 정기적인 세미나를 했고, <열하일기> 쓴 박지원도 파고다공원 뒤에서 늘 대중을 만나 지식을 논했지요. 교실에서 하는 물음도 중요하지만, 일반 대중의 질문은 좀 더 실용적인 물음일 경우가 많아요. 일반 대중들에게서 제가 배우고, 교실에서는 학생들에게 좀 더 생생한 강의를 하는 데 도움 받는 경우가 많아요. 예수님, 세례요한, 바울도 다 거리와 아고라에서 말하셨으니까요. 

어느 시절 영성이 담긴 책들이 유행하다가, 지금은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 토크콘서트가 유행하는 것 같다 본회퍼가 말했던 ‘값싼 은혜’ 가 쉽게 퍼져 있습니다. 가상 만족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생각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두 명의 사람은 피해 가지요. 분명 현상을 보고 알았는데 말입니다. 북콘서트는 저자와 만남을 통해 사회 현상이나 여러 문제들을 알고 보는 데까지는 모두 공감하는 것 같아요. 나는 어떤 현상을 안다. 그리고 무엇을 안다. 그런데 거기까지 하고는 만족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행동 없는 지성들, 우리의 영성의 단면이지요. 그런 인문학 강연, 그런 북콘서트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편이에요. 

영성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영성의 핵심이 무엇일까 영성의 핵심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겠죠. 무릎 끓고 기도하는 것이 영성 생활의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 기도했던 것처럼, 그것도 무릎을 꿇고요. 핵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죠. 움직이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무릎 끓는 기도하고, 종일 약자와 빈자를 만나러 ‘움직이는 기도’ 를 하셨죠. 그런데 우리는 무릎까지만 꿇고는 다했다고 생각하지요. 움직이는 기도와 연관되지 않는 무릎기도는 심하게 말하면 자기세뇌일 수 있어요. 

참 쉽지 않은 기도다 그렇죠. 카프카가 소설 <변신>에서 말했듯, 저도 벌레 같은 미물입니다. 영화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 선생님의 <벌레이야기>도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나온 언어죠. 무릎 꿇는 기도도 안 하고, 사마리아인처럼 ‘움직이는 기도’도 안 한다면, 참 게으른 벌레의 영성이 아닌가 생각하곤 해요. 

인문학의 열풍은 꾸준하게 언급되고 있다.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그런데 인문학을 기능적으로 대하는 것은 조금 불편하다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면서 왜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하는지 생각하곤 해요. 인문학을 성공학으로만 강조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인문학의 의미는 네 가지라고 봐요. 첫째는 ‘소통의 인문학’ 입니다. 인문학은 소통을 위해 존재해야죠. 인간을 마주 대하고 대화하기 위해서, 내가 모르는 사람과 좀 더 대화하기를 위한 인문학인 거지요. 결국 인간 이해입니다. 둘째는 ‘책임 있는 인문학’ 이죠. 악의 체계 아래서 그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을 위해 살며 악의 구축을 위해 기여하는 삶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이단이나 문제 있는 교회에 나가 성실하게 신앙생활 하는 그 성실성이 ‘악의 보편성’ 에 기여하는 패착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나눔의 인문학’ 이죠. 고전, 클래식이라는 의미의 원어인 클라시스(classics)는 함대라는 뜻이고요. 클라시쿠스는 함대를 거느린 최고위층의 부자들을 말하죠.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힘과 정보를 다른 사람과 나누었던 거죠.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교실도 이런 일이죠. 넷째는 ‘창조의 인문학’ 입니다. 과학과 인문학을 결합시켰던 스티븐 스필버그나, <토이 스토리>를 만들었던 회사 픽사의 창조성도 배워야 하겠죠. 

경계인으로서 교회와 세상에 함께 말을 걸고 소통하게 하는 발걸음에 기대를 품어 본다 큰 업적 이전에 실수만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실수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도 쉽지 않은 거 같아요. 경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양쪽에서 칭찬받는 경우보다, 양쪽에서 다 얻어맞는 경우도 있어요. 한국과 일본의 사이, 학교 수업과 대중강연의 사이, 학자와 작가의 사이, 교회와 사회의 사이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토록 모자란 제 숙명 같아요. 많이 가르쳐 주시고 지적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시인이지만 문학 텍스트와 교회와 기독교 주제와 내용에 있어서는 그 어떤 목회자보다 통찰력과 깊이를 느낄 수 있는 만남이었다. 그런데 그것뿐이었다면 탁월함만 남았을 터이지만 만남의 시간과 그 과정에서 시인 김응교는 따스함과 겸손, 그리고 배려를 보여주었다. 어쩌면 후자가 훨씬 더 강력해 보이기까지 했다. 소통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시인이었기에 더더욱 큰 기억으로 남는다. 아름다운 시의 언어로, 그리고 대중 속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한 사람으로서, 교회에서 세상의 이야기를 흥미 있게 엮어내는, 그리고 세상에서 기독교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그를 더욱 기대해 본다.


문화매거진 오늘 11-12월호 책읽는 마음, 

그늘에서 신을 진실히 마주하다│그늘 - 문학과 숨은 신, 김응교 문학에세이 1990-2012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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