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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햇빛 아래 노니는 삶

가을이 주는 알찬 기쁨


바람에 실려 오는 들녘의 향기가, 피부로 느껴지는 햇볕이, 가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요즘이다. 바람은 방향을 바꿔 불기 시작하고 이제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해져 겉옷을 입지 않으면 감기가 걸릴 것 같은 날씨다. 산과 들에 잎들은 낙엽이 되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밭에는 겨우내 자랄 작물을 심고 관리하는 일들로 분주하다.

# 땅의 힘. 한동안 비어 있던 밭에 새로 거름을 뿌리고 채소들을 심었는데 시금치와 상추, 겨울초 모두 연한 잎이 자라난 모양이 참 귀엽고 예쁘다. 가을 배추와 무의 싱그러운 잎은 무성하게 자라나고, 또 그 잎을 먹으려 몰려드는 벌레들은 기세 좋게 잎을 갉아 먹는다. 주로 나비과 애벌레나 잎벌레 종류 등이 많은데 한 번 생겼다 하면 하나하나 잡아주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모여드는 벌레를 쫓기 위해 나무를 태운 연기에서 추출한 목초액을 희석해서 열심히 뿌려주는데도 조금 덜 생길 뿐 벌레는 계속 생긴다. 얼마 전 며칠 신경을 써주지 못하고 놔두었더니 몇몇 배추는 앙상하게 줄기만 남아있었다. 벌레들도 먹고 살아야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작물을 지키면서 벌레와 친해지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벌레들이좀 갉아 먹더라도 김장할 때는 속이 꽉 찬 배추를 수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들판엔 벼 이삭이 제법 많이 영글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 추수를 끝낸 논도 있지만 우리 논에는 벼를 조금 늦게 심어서 아직 충분히 익지 않아 수확을 기다리는 논이 대부분이다. 여름에 잡초들과 씨름할 때는 걱정이었는데 올해는 비교적 벼농사가 잘된 편이라 좀 다행이다 싶다. 봄에 못자리를 하고 모내기를 했던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벼가 이렇게 자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매년 농사를 짓지만 참 신기하다. 고추도 작은 모종을 심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내 가슴만큼이나 키가 자라 풋고추도 한참 따먹었고, 붉은 고추도 제법 많이 수확하여 올 겨울과 김장 때 쓸 고춧가루는 넉넉할 것 같다. 고추는 병이 잘 걸리고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지만 약 한 번 뿌리지 않고 그렇게 많이 신경 써주지 못했는데도 늘 풍성하게 열려주어 너무 고맙다. 매년 그렇게 계속 심어 대는데도 매년 잎을 키우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 땅의 힘은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 씨앗. 곳곳에 심어둔 꽃과 채소들의 씨앗을 받는 일이 한창인 요즘이다. 올봄에 시험적으로 조금씩 다양한 종류의 잡곡을 심었는데 각각이 열매 맺는 모습을 보면 참 보기도 좋고 또 매일매일 잘 여문 열매를 수확하는 즐거움은 감히 어디에 비유할 수 없는 기쁨이다. 콩, 팥, 녹두, 결명자, 수수, 메밀, 조, 기장 등등 각각의 색과 모양으로 어찌나 아름답게 열매를 맺는지, 또 그 꼬투리에서 막 튀어나온 콩은 어찌나 반짝거리고 예쁜지, 또 붉게 물들어 고개 숙인 수수는 얼마나 멋진지 모른다. 며칠 전 수수를 한 데 묶어 현관에 매달아 놨는데 문을 지날 때마다 그 꽉 찬 알곡들을 보면 참 행복하다. 그 작은 씨앗들이 이렇게 자라 이 많은 열매를 맺고 내년이 되면 또 땅에 심겨 열매 맺을 생각을 하니 씨앗은 참 아름다운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벼를 베어낸 논에는 땅을 정리하고 밀을 심을 계획인데 밀은 비교적 재배하는 것이 쉽고 손을 많이 타지 않아 특히 내가 좋아하는 작물이기도 하다. 늘 생각한 것보다 잘 자라주는 것 같아 올해는 작년보다 많이 심을 생각이다. 수확한 밀로 밀가루를 만들고 요리를 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밭 주위에 비어 있던 땅에는 완두콩을 심었는데 얼마 전 싹이 났다.
완두콩은 보리 심을 때 심는 콩이라 하여 보리콩이라고도 하는데 모내기 전 봄에 싱그러운 초록색 콩을 수확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아직 손톱만한 잎이 겨우 피었지만 잎이 풍성해지고 줄기가 자라 꽃을 피워낼 것을 생각하면 참 설레기도 하고 곧 내릴서리가 걱정되기도 한다. 서리가 좀 천천히 와서 콩들이 좀 편하게 겨울을 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 벼 수확도 끝나지 않았고 마늘과 양파도 심어야 해서 할 일이 가득한데 내가 좀 더 부지런해지고 땅과 풀과 벌레들의 마음을 잘 아는 농부가 되어야겠단 생각이 드는 가을이다.

요즘은 일을 마치고, 늦은 오후에 종종 산과 들로 산책을 가는데 해질녘 노을빛이 참 따뜻하고 좋다. 일을 하다가도 노을 지는 하늘이 너무 예뻐서 하던 일을 젖혀두고 사진을 찍기도 하는데 그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찍으면 어느 정도 담아낼 수는 있지만 그 섬세한 느낌까지는 담을 수 없기에 조금 아쉽기도 하다. 우리 마을에는 감과 밤을 많이 키우는데 수확하고 남은 것들이나 일손이 모자라 그냥 내버려둔 나무가 많다. 산책을 하다가 눈에 들어오는 밤을 줍고 감을 따 먹기도 하는데, 가을 중턱에서 먹는 홍시는 정말 달콤하다. 끈적거리는 붉은 속을 목으로 넘기자면 기분까지 좋아진다. 이제 곧 서리가 내릴 것이고 더 추워지면 채소들이 동해를 입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오늘을 즐기며 부지런히 일해야 할 것 같다.

김진하|지리산 산청 골짜기에서 흙냄새 풀냄새 맡으며 농사짓는 서툰 농사꾼. 민들레공동체에서 생활하며 민들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일하며, 매일매일 농사일로 머리가 꽉 차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느낀 대로 사는 고민 많고 속편한 스무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