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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1 05-06 마음의 쉼표

마음의 쉼표 1│시간을 누리는 삶으로 초대

시간의 속도 vs 시간의 온도

한 사람을 알아가는 것에는 몇 가지 층위가 있다. 그 중 하나는 그 사람의 물리적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장과 체중, 피부색이나 체형 등이다. 허리 치수나 목둘레 등도 옷을 고를 때 필요하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의 건강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시력이나 청력, 혈압과 맥박, 근력과 지구력, 체온이나 폐활량, 콜레스테롤 수치 등등. 나아가 그 사람의 능력에 대한 정보도 필요할 것이다. 지능지수나 기억력, 언어구사력, 절대음감이라든지 공간지각력 등이여기에 해당하겠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그 사람을 제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조금 다르다. 음색이나 표정, 성품이나 기질, 그리고 결국은 모종의 인격적인 영역까지 앎에 이르러서야 그 사람을 좀 안다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것에도 비슷한 대응을 해볼 수 있다. 수명, 가족 관계, 재산 등에 관심이 갈 수도 있지만, 다른 편으로는 그가 사랑했던 사람, 그의 작품, 그의 가르침이 관심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속한 세계를 한 가지 측정 도구나 한 측면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시간에도 이런 여러 가지 층위가 존재한다면, 시간의 길이와 속도, 시간의 무게와 밀도, 시간의 온도와 습도 등을 상정할 수 있겠다. 이제껏 시간의 길이와 속도에 그저 쫓겨 살던 이들에게는 각 시간의 소중함과 효율성을 강조하며 그 무게와 밀도에 대해 가르쳐줘야 하고, 나아가 그 무게에 눌려 살거나 그 밀도에 숨 막혀 하던 이들에게는 시간의 따뜻함과 촉촉함에 대해 알아가는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사실 오늘의 이야기는 시간의 길이와 속도, 무게와 밀도에서 시간의 온도와 습도로 그 관점의 전환을 요청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두 딸을 둔 아빠가 아직 유치원생이었던 둘째 딸에게 여느 때처럼 이렇게 물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딸의 대답은 “아빠는 언니가 좋아, 내가 좋아?”였다. 그 질문의 핵심을 알고 있는 듯한 이 역공에 아빠가 KO패 당했다. 사실 이런유의 질문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의미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근거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 기호와 선택의 문제이고, 동시에 그 답을 요구하는 사람은 일종의 정치적 압력을 은근히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엄마 아빠에 대한 처지를 밝혀야 하는 곤혹스런 질문은 한번 웃어보자는 의도가 아니라면 무척 불순한 것이리라. 하지만 사실 아빠들은 이런 질문에서 수세이긴 하다. 주로 자녀들은 엄마들과 관계적인 친밀성을 형성하고 있기에 이 질문에서 아빠가 선택받기 위해서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지도 모른다.
남녀의 성 역할이 재편되고 있는 현대적인 시대에는 적절한 비유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전통적 의미에서 엄마와 아빠를 떠올린다면 우리의 삶에는 ‘아빠 같은 시간’과 ‘엄마 같은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과업 중심의 효율적인 일과를 계획하며 달려가야 하는 아빠들의 삶과 관계 중심의 인격적인 일과가 대부분인 엄마들의 삶을 잠시 비교해 보자.
엄마들도 늘 쪼들리는 살림과 고단한 하루하루를 사셨지만, 우리가 쉼을 누리던 곳은 엄마의 품이었을 확률이 높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삶은 아빠스러운 시간의 연속으로 자꾸 달려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이들의 애정 관계 선택에서 아빠들은 늘 수세이면서도, 세태가 요구하는 삶의 경향으로서 급기야 이 땅의 여성들도 부득이 선택해야 하는 아빠스러운 삶은 왠지 곤혹스럽다.

소박한 목표, 사랑하는 이들과 저녁식사
‘관계중심 시간경영’이라는 강의를 진행하며 우스개처럼 던지는 진지한 질문이 있다. “시간 관리의 동기가 뭐죠?” “이렇게 성실히 삶을 아껴서 어디에 쓰시려구요?” 답변들은 사실 아주 형이상학적이거나 한편으로 다소 궁색할 때도 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부끄러움 없이 살겠다는 신앙적인 답에서부터 좀 여유로운 미래를 대비하려 한다는 실질적이고 솔직한 답까지 듣게 된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정돈된 내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오직 나 자신의 성취를 주변에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달려가는 이들은 혹 있더라도 드뭅니다. 대부분은 무언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를 이끌지요. 언제고 부모형제, 아내 그리고 자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우리는 사실 현재를 반복적으로 희생하며 막연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룰 성취 이후에나 그 행복과 쉼을 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길 일란 다하여’ 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지요.”
이젠 놀랍지도 않은 사실 하나는 도시 직장인들 대부분이 주중에 가족들과 저녁 식탁을 함께하는 일이 극도로 드물다는 것이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다르지 않다는 미국 쪽 통계도 있다. 주로 야근과 접대로 저녁 약속을 잡기 십상이고 가족들과는 주말과 휴일에 외식으로 이를 벌충하는 것을 운명이라 여긴다. 집에서 9시 뉴스를 보는 것만 해도 일찍 퇴근하는 편인셈이고, 중고생들의 학원 생활 때문에라도 온 가족의 저녁식사는 사치스러운 상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시간의 속도와 밀도를 다소 양보하고 시간의 온도와 습도를 높이기 위해서 소박한 목표를 하나 제시하고 싶다. 주중 하루 이틀이라도, 다소 늦은 시간일지라도, 갖춘 만찬이 아니더라도,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하기 위해 애써보자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목표를 성취한 후에 휴양지에서 여유롭게 누리는 디너파티는 어찌 보면 참된 쉼이 아닐 수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은 낭비도 허비도 아니며, 미래의 성취를 위해 절제하고 미뤄야 할 마시멜로우 캔디는 더욱 아니다.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 삶의 본질이다.


황병구|한때 전자공학을 심각한 수준까지 공부했으나, 하나님의 우발적인 인도하심으로 기독문화운동에 투신하여 프로듀서로 동분서주하다가, 지금은 공익경영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사회선교재단 한빛누리의 운영본부장, 월간 복음과상황의 편집위원장이며, 최근 <관계중심 시간경영(KOREA.COM)>이라는 자기계발서의 탈을 쓴 자기부인서를 출간했다. 트위터 @hizsound 페이스북 facebook.com/hizsound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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