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도 춥고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습니다. 봄, 나비가 날고 꽃이 점점이 피고 새들이 번식하는 시절. 한데 봄꽃들이 피어나기도 전에 오후의 햇살은 벌써 뜨겁고 봄을 앗긴 것 같은 묘한 날씨가 이어집니다. 겨울인지 봄인지 모를 애매한 삼월 지나니 잔인한 사월. 그래도 오월은 여지없이 찾아옵니다.
영랑은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린다고 했지만, 오월은 예외입니다. 찬란할 뿐, 슬픔 따윈 모란에게 줘버리자고요. 오월은 사랑하기 좋은 때. 서울 어디에서 데이트할까 고민스런 청춘이라면 이촌역에서 만나는 겁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한강 시민공원으로 죽 걷다 보면 눈을 찌르는 오월의 붉은 장미. 아무렇게나 서너 송이 꺾어 가시만 떼어내 그녀에게 건네도 좋습니다. 괜찮습니다. 오월에 안 그러면 언제 그러겠어요. 

로베르트 슈만도 연가곡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Op.48)> 에서 이 계절에 사랑의 기쁨과 고통에 몸서리치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본디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노래의 책> 중 ‘서정적 간주곡’ 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우리 보기엔 망측하지만, 사촌과 나눈 사랑에 관해 심심치 않게 일화를 남긴 다른 서양의 작가나 음악가처럼, 하이네 역시 이 시에서 사촌동생과 이루지 못한 사랑에서 오는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슈만은 스승의 딸 클라라와 저 유명한 사랑에 성공, 마침내 결혼에 골인하고 무서운 기세로 곡을 쏟아내던 1840년에 이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여 열여섯 편인 이 연가곡을 완성합니다. 별볼일 없는 자신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는 장인과 법정소송까지 하며 보낸 지난 시간을 생각하자면, 이제 눈앞에 아내가 되어 앉아 있는 클라라를 보며 얼마나 마음이 짠했겠어요.
이 해에만무려 100곡의 가곡을 썼다고 하니 슈만의 일생을 이야기할 때 1840년은 보통 ‘노래의 해’ 라고 불린다지요. 사나흘에 한 곡씩 완성한 셈인데, 그중에서도 <시인의 사랑>은 그런 대량 생산의 와중에 탄생한 곡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곡 하나하나가 보석같아요. 사랑에 포획된 젊은이의 정신없음을 나타내는 듯 몽환적인 반주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오월에’ 와 아홉번째 곡 ‘플룻과 바이올린’ 등 반주도 무척 아름다워 피아니스트들이 더 좋아하는 곡이라고도 합니다. 특히 ‘아름다운 오월에’ 는 쨍하고 맑은 날이면 라디오 음악채널에서 자주 들려주는 노래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이 곡이 사랑 받은 이유는 단연 독일의 자랑, 20세기의 대표적인 성악가 프리츠 분더리히의 레코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조금 코맹맹이 같은 음색으로 독일 낭만주의의 격정과 숭고미를 한껏 끌어올리는 헤르만 프라이나, 이 곡을 여섯 차례나 녹음한, 그것도 알프레드 브렌델이나 블라디비르 호로비츠 같은 피아노의 거장들하고만 한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힘있는 노래도 걸작이지만, 아무래도 가장 듣기 편한 건 프리츠 분더리히의 노래인 듯합니다.
특히 1965년에 녹음한 음반은 지금도 명반으로 꼽히는데, 그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불타는 사랑의 열망이나 무거운 고뇌, 비통마저 불순물을 걸러 정제한 듯, 감정의 순수 결정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1965년이면 그가 어이없게도 계단에서 떨어져 불과 서른여섯에 뇌진탕으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누가 부르든 <시인의 사랑>을 듣고 있노라면, 바로 그 ‘시인’ 의 얼굴에 누구보다 요절한 분더리히의 얼굴이 오버랩됩니다. 46년 전 마지막 봄에 그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요?


강영특| 편안한 소파에 기대어 지그시 눈을 감고 음악을 듣다가 그만 잠들어버리고 마는 클래식 초보. 그래도 책은 고전이 최고라고 믿는 고지식한 출판 편집자.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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