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 구례를 떠나 있던 어느 날 아침,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니, 김선상! 어디 있는 거야?” “네?” “열쇠가 안 맞잖어, 아이쿠, 지금 내가 대문 열쇠를 잘못 가져왔나 싶어서 몇 번을 집에 다녀왔는디 아무리 해도 안 맞어. ” 아차! 이런, 큰일이군. 집을 며칠 비우며 집주인 아저씨께 드렸던 열쇠를 찾질 못해 다른 자물쇠로 대문을 잠궈 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아저씨께서는 우리집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약을 치러 오셨다가 적잖이 당황하셨던 것이다. 다른 자물쇠로 대문을 잠그고 왔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지만, 노발대발 화를 내시다가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겠다고 하신다. “자물쇠가 망가지는 것은 상관없어요. 그런데 아저씨께서 아침부터 더운데 고생스러우실까봐 걱정이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잠이 확 달아나는 이른 아침.

여행은 끝나고 이젠 삶의 터전으로
며칠 뒤 집으로 오는 길에 천안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유명하다는 호두과자집을 들러서 주인아저씨께 드릴 호두과자를 사고, 음료도 구입했다. 집에 와보니 자물쇠가 멀쩡하게 달려 있어서 더 죄송한 마음이 든다. 자물쇠를 부수겠다고 하신 것은 화가 나서 한 말씀이었고, 담장을 넘어 일을 하신 것이 분명하다. 두 손에 먹을거리를 싸들고 주인댁 대문 앞에 섰다. 주인아주머니께서는 반가운 얼굴로 달려 나오신다. 과일도 깍아주시고, 차근차근 그 때의 상황과 마음을 이야기 하신다.
아저씨께서는 내가 친하게 지내는 같은 골목에 사시는 농부아저씨를 은근 질투하면서 “아니, 내가 집주인인디, 왜 그 양반한테는 이런 저런 부탁도 잘 허고, 나헌테는 어디 온다 간다 말도 없는 겨? 며칠 집을 비우면 집 좀 한번 들여다 봐주라고 하기도 허고, 김치도 없으면 가져다가 먹고 그려. 그게 이웃이고 사람 사는 것이제.” 
그간 서운했던 마음도 비추시고는 혼자 사는 나를 더 걱정해주신다. 구례는 워낙에 치안이 좋은 곳으로 유명해서 대문은커녕 현관문도 안 잠그고 멀리 외출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을 알면서도 내심 나는 혼자 사는 처녀이니 두려운 마음도 있어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살았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대문을 잠그지 않는다. 마당에는 밭농사 도구들, 신발장, 자전거 및 여러 가지 물건이 놓여있지만, 혹시라도 손이 타거든 누군가 필요해서 가져갔겠거니 생각하기로 한다. 너무 더운 밤에는 현관을 열고, 툇마루에서 잠을 자기도 하지만 이제는 마음에 불편함이 없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
5월 말에 시작한 고구마 심기를 6월까지 계속했다. 그 때 나는 혼자 힘으로 온갖 고생을 하며 고구마를 심었다. 날씨 때문에 마음을 졸이며 다른 곳에 가야 하는데 차 시간을 놓칠까봐 정말 정신없이 고구마를 심던 날, 함께 밭을 빌려 밭농사를 하는 언니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나는 밭에 있다가 연락을 놓쳤고, 또 이동을 하는 중에 전화를 못했다. 며칠이 지나 집에 와서 언니에게 뒤늦게 연락을 드렸더니, 언니는 심기가 불편한 상태. 너무 늦은 연락에 불쾌하셨던 것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온 시골에서 젊은 언니네 부부가 늘 든든하고 힘이 되었는데, 뭔가 내게 중요한 사람이 나 때문에 맘이 상했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시간이 좀 필요했고, 시간이 좀 흘러 어색했던 관계도 좋아지는 중이다. 
사람들과 섞여서 마을에 들어와 살다 보니 이제는 갈등도 생기고, 맘 상하는 일도 생긴다. 어쩌면 늘 좋기만 할 수 없는 인생이 여기서도 펼쳐지고 있다. 꿈만 같고, 내내 여행지에서 지내는 것 같던 이곳 생활이 이제는 내 삶의 터로 바뀌고 있는 중이구나.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과 교회에서 뵙는 어르신들, 집으로 찾아와 먹고 놀고 또 공부하고 돌아가는 동네 아이들, 한 마을을 이뤄 사시는 어르신들 모두 이제는 그저 낯선 곳에서 만난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인 것만 아니라 서로 걱정도 하고,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이젠 이곳도 삶의 날것이 엮이는 그런 곳, 그런 사람이 사는 곳으로 내게 다가온다. 

해바라기 꽃이 피었습니다
성은이와 하은이는 내가 구례에서 만난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이틀에 한 번씩 집에 와서 밥도 먹고 피아노도 배우고, 부모님 퇴근하실 때까지 놀다가 잠도 자고 가는 나의 베프. 함께 부침개도 부쳐 먹고, 스파게티도 만들어 먹고, 냉커피도 타 마시며 우정을 쌓아왔다. 이제는 서로가 ‘아’ 하면 ‘어’ 하는 관계이다. 함께 손을 잡고 길을 걷다가 다리가 아프다는 8살 하은이를 엎어줬더니 아이들이 하는 말. “가끔씩 선생님한테 엄마라고 부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서울에 올라가면 늘 아이들이 생각나 머리끈도 사고 양말도 사온다. 성은이는 탁상달력에 늘 스케줄을 써놓는 나를 따라하려고 어디선가 탁상달력 하나를 구해다가 우리집에 오는 날짜를 적어놓고, 나름의 스케줄을 정리한다. 아이들에게 이웃에 사는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던 내 마음이 이내 아이들 안으로 스며들어갔음이 느껴진다. 나를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고 친구로 받아준 아이들이 내심 고맙다. 

여름이라 푸르른 하늘에 높은 지리산에 걸려 있는 구름이 정말 아름다워 운전을 하다 잠시 서서 멍하니 산과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일상인 이 곳.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는 바로 사람, 사람들이다. 이곳에서 나의 새로운 삶은 사람들과 살며 여행이 아닌 진짜 삶이 되어 가고 있다.


김루| 도시에서 오랜 시간 영어강사로 일을 하다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진리와 자유,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고 연주하며 살아가고 싶어 시골에 내려온 책과 커피와 채소를 사랑하는 지리산 남쪽에 사는 처자.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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