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네요. 벌교 산골에도 첫눈이 내렸습니다. 늦은 밤인데도 아이들은 신나서 랜턴을 손에 들고 양말도 신지 않은 채 뛰어 나갑 니다. 허공에 떠있는 꽃송이처럼 바람의 손을 잡고 춤추는 눈송이가 아이들이 흔들어 대는 랜턴 불빛을 만나니 어둠으로 가득한 산골에 꽤나 운치가 더해집니다.
둘째 녀석은 달려와 상기된 목소리로 제게 묻습니다. “아빠는 겨울이 좋아요, 여름이 좋아요?” 그리고는 대답도 하기 전에 자기는 겨울이 더 좋다며 형하고 동생이 있는 쪽으로 뛰어 갑니다. 아이들 셋은 하나 같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꽃송이를 받아먹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 적막감조차 엄습하는 야밤에 느릿느릿 내리는 함박눈 사이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신명난 웃음소리와 해 맑은 표정들 그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시간이 멈추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손이 바쁜 산골의 겨울 나기
사실 초겨울 산골 살림은 가을걷이 때 만큼이나 바쁜 시기입니 다. 대부분 모든 것을 자급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할 일은 더 많아집니다. 우선 미처 다 팔지 못한 호박고구마며 참다래를 정성껏 선별하여 친구들에게 보내야 합니다. 팔 수 없는 참다래는 식초나 효소 또는 여름철 음료용으로 깎아서 얼려야 하고, 상처 난 고구마는 가마솥에 쪄서 말려가지고 살림살이에 보태기도 하고 아이들 겨우내 간식거리로 장만해야 합니다. 이외에도 갓, 무, 알타리, 배추 등을 갈무리해서 김장하는 것은 기본이지요.
초겨울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큰 일거리는 산에서 나무하는 일입니다. 마을 할머니들 말씀에 “곡식 들인 것보다 땔감 들인 것이 더 배부르다” 라고 하시던데 정말이지 산에서 나무 한 경운기 가 득 싣고 내려올 때 느끼는 포만감은 원시 인간부터 내려오는 태곳적 감정 그대로일 듯싶습니다. 올해는 태풍에 쓰러진 나무가 많아서 나무하기가 수월한 편입니다. 나무가 열심히 축적해 놓은 
태양열로 우리는 방을 데워서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으니 나무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입니다.


맨살로 만나는 자연
겨울나기의 중요한 일감인 땔감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에는 아이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힘이 닿는 한 최대로 무거운 나무토막을 경운기에 싣느라 구슬 땀을 흘립니다. 집에 와서는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는 아빠를 흉내 내기도 하는데, 운이 좋으면 몇 번은 단번에 쪼개는 데 성공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이의 얼굴에서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자신감이 표출되곤 하죠. 
이렇게 겨울을 준비하는 노동을 통해서 아이들은 자연과 맨살을 마주 대하는 복을 누립니다. 아이들은 사람이 자연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은연중에 체득하며, 미약하나마 가정의 살림을 꾸리는 데 보탬이 되고 있다는 자부심도 느끼고, 적당한 노동을 통해서 몸과 마음이 자연의 속도만큼 자랍니다. 더구나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그런 모든 일에 자신의 존재를 다하여 즐깁니다. 그 모습을 볼 때, 진정 자연이야 말로 아이들에게는 어머니요, 교사요, 친구요, 놀이터임을 깨닫습니다. 


아궁이에 장작불 댕겨 놓고 잠시 책상에 앉았는데, 산 아래에서 개가 짖네요. 아이들이 올라오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비닐 포대 넉 장 챙겨서 아이들 마중을 나갑니다. 주머니엔 한가득 고구마 말랭이로 채우고 아궁이에도 호박고구마 몇 개 던져 놓습니다. 갑작스런 아빠의 등장에 아이들 얼굴에 활짝 필 함박꽃을 그리며 ….


아! “여름과 겨울 중 어느 것이 더 좋냐” 는 둘째 아이의 질문에 대답을 못했네요. “사실 아빠는 베짱이처럼 놀 수 있는 여 름이 좋단다. 그래도 비닐 포대 깔고 눈썰매 신나게 타는 너희들 생각하면 겨울이 더 좋다. 사랑한다.”    


최혁봉|벌교 산골살이 여덟 번째 겨울을 살아내고 있는 농부요 목사. 자연을 맨살로 대하는 농사야 말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온전한 인간이 되는 좋은 길이며, 사회적으로도 다시 되돌아가야 할 삶의 형태라 여겨 자연에서 기도와 노동을 실천하고 있다(주로 참다래와 호박고구마등을 농사지으며 살림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salimfarm.com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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