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 물결 뒤치며 어디든지 태양빛에 향기 진동 하도다~.” 어릴 적 예배당에서 이맘때면 항상 부르던 찬송가 가사가 절로 입에 흐르는 요즘이다. 내가 사는 광의면은 구례 논농사의 40%를 차지한다고 할 만큼 많은 논이 펼쳐져 있다. 태어나서 언제 이렇게 많은 벼 이삭을 봤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눈을 돌리면 여기도 저기도 익어가는 곡식으로 가득해 가을이 왔다고 외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이곳에 온 그해 겨울
일을 하러 이곳저곳에 있는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면 언제나 지나는 길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전부 다른 색으로 변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구례에서 첫 가을, 코끝 시리는 아침저녁은 겨울의 향기가 나지만 후텁지근한 기운이 가득한한낮의 태양은 여전한 기운으로 길가에 이삭을 바짝 말려주고 있다.
동네 어르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논에 나가 계시고, 주말이면 아이 어른 모두 논으로 나가 이삭을 말려 자루에 담는모습이 이젠 너무 익숙하다. 그 광경을 보면 자연스레 나도 언젠가는 땅을 가지고 저렇게 농사를 짓고 싶다고, 나의 아이들과 작은 가족농을 이루어 시골에서 삶을 잘 지켜나가고 싶다고 스스로 되뇌곤 한다.
이제 이 가을이 지나면 추운 겨울이 오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구례에 오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피아노와 책장, 그리고 책들과 책상, 집에서 쓰던 화장대와 문갑 하나를 작은 용달차에 싣고 구례에 도착했던 첫 날. 날씨가 맑아 참 좋았지만, 모든 게 낯설고 처음인 곳에서 다행히도 좋은 이웃을 만나 감사하게 첫날을 보냈다. 일주일 동안 집을 청소하고 직접 도배도 하고, 페인트도 칠하며 시골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가 교차했다. 겨울에는 혼자 집안을 동동거리며 돌아다녔고, 눈에 띄지 않는 집안 곳곳을 조금씩 수리해가며 내 인생에 새롭게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다. 이제 다시 돌아오는 시골의 겨울이 조금은 겁이 나고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미 지난 일 년 동안 시골생활에 다져진(?) 몸을 믿고 이번 겨울 또한 거뜬히 이겨내리라 마음을 다잡는다.  

나, 구례, 그리고 그
틀에 박힌 삶, 더 이상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삶에 종지부를 찍고, 과감히 택한 시골길에서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고, 또한 많은 사람이 내게로 찾아왔다. 그들은 이전에 만나온 친구와 또 다른 친구가 되었다. 커피숍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안녕 인사를 하는 친구가 아닌 좀 더 깊이 인생을 고민하고 꿈을 나누는 친구 말이다. 젊은 도시 처자가 갑자기 왜 시골로 왔을까 궁금해서 다가온 사람도 있었고, 자신의 삶과 이익보다 누군가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친구도 만날 수 있었다. 스토리가 없다고, 매일이 똑같다고, 너무나 지루하다고 여겼던 날들이 떠남과 만남, 그리고 또 다른 시작으로 바뀐 일 년이다. 시골에 가서 살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두 가지 질문을 빠뜨리지 않고 물었다. 첫 번째는 “너 시골가서 뭐 먹고 살래?”였고, 두 번째는 “결혼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였다. 하지만 오히려 시골에 왔기 때문에 먹을 게 많아 굶어 죽지 않고 살았다. 이웃이 가져다주시는 쌀과 김치, 여러 곡식과 채소가 마치 내게는 선물과도 같았다. 또한 지금까지 내게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아이들을 만났고 도시에서 하던 일을 계속 시골에서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또한 무엇보다 새롭게 맺은 관계에서 가장 귀한 만남은 바로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좋은 사람을 만난 것이다. 친구와 노래를 만들어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어 달려간 곳에서 나는 아주 오래된 친구의 친구를 만났고, 우리는 마음을 나눴다. 그리고 올해가 가기 전에 새로운 시작을 한다. 아마 도시에서 생활을 꾸려갈 생각이라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저 감사하게 무상으로 빌려 쓰고 있는 넓은 마당이 딸린 시골집이기 때문에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결혼을 이야기하고 꿈을 꿀 수 있었다. 
도시에 사는 대다수 사람은 대출과 이자에 허덕이며 집을 마련하고 분에 넘치는 살림으로 결혼을 시작한다. 나도 막상 결혼을 생각하니 사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손을 대자니 한도 끝도 없이 밀려오는 촌집의 생활이란 불편함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미 나 혼자서도 큰 어려움 없이, 심지어 아이들이 모여들어 밥해 먹고 놀다 가고 자고가도 불편함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숟가락 하나 더 얹어 함께 살 사람 하나 더 들어왔다고 해서 살기 어려울까?’ 하는 생각이 드니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하는 답이 내 입에서 흘러 나온다. 불편함이야 조금 참고 살면 되는 것이고 대신에 넉넉한 마음과 아름다운 자연, 시골에서 생활하기에 충분할 만큼 벌이가 되는 일자리가 있으니 더 이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부족함에 마음 쓰지 않고 즐겁고 유쾌하게 시작하고 싶다. 아마 우리도 장담할 수 없는 미래가 다가오겠지. 살다 보면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 지도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바로 여기, 분명한 삶의 이유가 있고, 즐거움이 있고, 새로움이 있기에 나는 구례가 참 좋다. 내게 만족과 행복을 가르쳐 준 구례가 나는 참 좋다. 나는 구례에 산다.  


김루 |도시에서 오랜 시간 영어강사로 일을 하다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진리와 자유,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고 연주하며 살아가고 싶어 시골에 내려온 책과 커피와 채소를 사랑하는 지리산 남쪽에 사는 처자.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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