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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2 09-10 편지, 할게요!

편지, 할게요 7│원유진이 삐용이에게

날이 선선해져서일까, 네 배에 코를 박거나, 이마에 이마를 대고 잠드는 게 더 좋아졌어.
여름이라 찐득찐득할 때에는 네 털이 자꾸 얼굴에 묻어나는 것 같아서 좀 그랬거든.
털 날린다고 아부지가 너무 싫어하셔서 얘길 못했는데, 나도 네 털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야.
애써 차려입었는데 네가 스윽 지나가서 털이 다 붙어있으면 순간적으로 울컥할 때 있지, 왜 안 그러겠어.
게다가 네 것인지 반호 것인지 모를 털 뭉치가 어디에선가 나타나면,
내가 마지막으로 청소를 한 건 언제였는지 까마득해지면서 엄마아빠 생각부터 난다니까. 
매일매일 빗질을 해줘야 털 날리는 게 덜할 텐데. 하긴 화장실도 제때 못 치우는 데 무슨 말을 더 해. 

그거 기억난다야.
자취할 때 내가 화장실 제때 안 치워준다고 나랑 방순이랑 집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가 집에 오자마자 방순이 옷 개켜놓은 데다가 우릴 쳐다보면서 쉬했잖아, 너.
쪼그마한 게 개냥이라고 개처럼 사람 반기고 부르면 오고 귀염 떨고 삐용삐용 거리기만 할 줄 알았지.
너한테 그런 성질머리가 있는 줄은 몰랐다니까. 
근데 있지, 서른이나 넘어서 독립도 못 하고 군식구라고 너희 둘 데리고 있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더라. 
부모님하고 따로 떨어져 살 땐 느끼지 못했던 설움 같은 게 있어.
내 경제력이 생각지 못한 데서 밝혀지는 민망한 순간이랄까?
며칠 전에 반호가 후다닥 뛰어나가다 엄마 팔을 확 긁어버린 일도 있었잖아.
그때는 별일 아닌 것처럼 굴었지만, 내가 얼마나 놀라고 겁난 줄 아니?
저번에 네가 방충망 뚫고 창밖으로 나간 것도 모자라서 화분을 두 개나 깨먹은 것도 있는데,
반호까지 그러니까 말씀은 안 하셔도 아빠의 화가 머리끝까지 났구나 싶은 거야. 
아, 인제 어쩌지. 저것들을 다 묶어놓을 수도 없고! 

하지만 삐용아, 이게 너희가 밉거나 싫은 문제는 아니야.
그냥 같이 사는 내 사정도 봐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지.
말은 안 통해도 동물적인 감각으로 네가 내 사랑을 느끼는 것처럼.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래, 난 한 번도 널 데려온 걸 후회한 적 없어.
반호가 외로울까 봐 둘째로 널 들인 건데 반호가 아직 널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
게다가 그게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땐 ‘아차’싶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널 데려온 걸 후회하는 건 절대 아니라니까! 

기억나지, 너 진짜 작고 못생겼었는데 내가 잘 먹여서 미묘(美猫)된 거라고 수의사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던 거. 
물론, 그런 적은 있어.
너 요도 막혀서 방광 터질 뻔했을 때.
내가 무식해서 네가 다 자라기도 전에 수의사쌤 말만 듣고 중성화를 강행한 거나
병원비를 못 내서 네가 필요한 처치도 못 받고 눈 감는 걸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나보다 지혜롭고 돈도 많은 주인을 만났어야 했던 게 아니냐고 생각한 적은 있었어. 
한 달 월급을 통째로 병원에 가져다 드리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너와 반호가 별 탈 없이 지내서 감사해. 

가끔 뜬금없이 내가 너희 둘을 꼭 껴안고 중얼거려서 귀찮을 때도 있겠지만,
너희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라는 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이 먹을수록, 또 너희랑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다는 걸 더욱 절실하게 느껴.
너랑 반호가 어쩔 수 없이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그래. 
매일 네가 원하는 만큼 놀아주기도 어렵고, 
사실 네가 원하는 게 뭔지 그때그때 다 알 수 없어서 끔뻑거릴 수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해주고 싶다구. 

가끔 너와 반호를 보면서 ‘그저 잘 살아있어 주는 것이 기쁨’이라는 말이 뭔지 실감할 때가 있어.
세상에서 성공하지 않고 다 쓰지도 못할 만큼의 돈을 벌어오지 않아도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되는 것.
출근할 때마다 신발장에 어떻게든 올라가서 가는 날 배웅해주는 것만 같을 때,
자려고 준비를 할 때면 베개 옆에 자리를 잡고 먼저 드러누울 때,
골똘한 표정으로 일 볼 때,
알고 보면 밥 내놓으라는 투정이지만 아침에 뭐라 뭐라 말하면서 내 잠을 깨울 때,
심지어 반호랑 한 판 할 때도 너는 그 자체로 사랑스럽고 귀해.
그러니 앞으로 할아버지고양이가 되어서 관절염 생겼다고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하더라도
네가 사랑받기 충분한 고양이라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그 말을 해주는 거야. 그러니 꼭 기억해. 

사랑한다, 삐용아!



●●● 보낸이 : 원유진

스노우캣이 귀여워 정신을 놓았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5년 차 고양이 집사가 되어 있노라는, 문화매거진 오늘의 기자. 여느 고양이 집사가 그렇듯 유기농 사료와 동물병원비에 재산을 탕진하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워도 행복하다.

●●● 받는이 : 삐용이

꼬리에 두 군데 이상의 골절을 입고 경주 모처에서 구조된 흔한 한국형 고양이(코리안 숏헤어). 첫날부터 심하게 말이 많아 ‘삐용’ 이란 이름을 얻은 후, 첫째인 반호에게 맞기도 하고 대들기도 하면서 말썽 많은 막내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