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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08 11-12 세상을 바꾸는 착한 소비

세상을 바꾸는 착한 소비 8 | ‘대형’을 추구하며 우리가 잃어가는 것들

 

어느 미국인 인디언 시장에서 양파를 파는 어느 노인에게 가격을 물었다. 10센트라고 하자, 좌판에 있는 양파를 모두 사면 얼마에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한 노인의 대답은 뜻밖에도 다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나는 지금 인생을 살러 여기 나와 있는 거요. 난 이 시장을 사랑하오.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하오. 친구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자기 아이들, 농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사랑한다오. 그것이 내 삶이오. 바로 그것을 위해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양파 스무 줄을 파는 거요. 그런데 한꺼번에 다 몽땅 팔면 돈은 벌겠지만 그걸로 내 하루는 끝이요.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는 할 수 없소.’


사람 냄새 나던 동네 구멍가게

역사 속에서 시장은 물건의 거래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정보가 오가고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였다. 혼사가 이뤄지며 각종 놀이판도 벌어지는 것이 재래시장의 풍경이었다. 그 특유의 무질서와 난잡함, 낯설음과 자유로움, 웅성거리고 떠들썩한 북새통의 활기는 생활의 잔잔한 에너지가 되어 왔다. 도시에서는 그런 장터의 풍경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재래시장이나 동네 구멍가게는 인간의 체취가 감돌았다. 그곳은 주민들이 교류하는 마당이요 이런저런 소식이나 소문들이 모여들고 퍼져나가는 ‘허브’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구멍가게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슈퍼마켓이 그 자리에 들어서 규모와 가격으로 세를 확장했고, 그 슈퍼마켓마저 얼마 전부터는 대형 할인마트에 밀려나는 형국이다. 슈퍼마켓은 더 이상 ‘슈퍼’하지 않다.

대형 할인마트는 대량구매를 통해 가격을 크게 낮춰 소비자들의 주머니 사정을 가볍게 해준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이지 않게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다. 우선 그렇게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구매하려면 자동차로 운반해야 하고, 집에는 커다란 냉장고가 필요하다. 그만큼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기름 값이 계속 오르면 그러한 유통 업태는 당연히 고비용으로 바뀌게 된다. 재개발하여 뉴타운이 들어서거나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면 ‘좌학원 우마트’라는 말대로 어디나 대형 할인마트가 들어서고, 그것이 생활의 큰 진보인 양 생각되지만, 그러한 생활양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 봐도 이렇게 동네의 가게들이 사라진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역이 생활을 지탱하는 기반

소비자로서는 당장 좋을지 모르지만 대형 할인마트는 사람들에게서 소박한 일자리를 빼앗아간다. 예를 들어 회사를 퇴직하고 노후에 구멍가게 하나 운영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이제 점점 어려워진다. 그나마 그런 가게를 운영하던 사람도 문을 닫고 마트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해야 할 판이다. 동네에서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사라지는 것은 주민들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상거래와 함께 유지되는 인격적인 신뢰와 따뜻한 이웃관계가 증발하는 것도 매우 큰 손실이다. 소비자로서 얻는 가격의 이익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거기에 담겨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절망하고 있다. 대박 또는 인생역전의 야망을 쫓다가 쪽박을 차고 생존의 벼랑에 몰리는 이들에게 경제는 무엇인가. 평범하게 생활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허물어버리면 사람들은 오로지 돈만이 최고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탐욕이 발동한다. 지역이 생활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어야 한다. 구멍가게 주인과 손님의 관계가 곧 이웃관계가 될 때, 조금 비싸더라도 그 가게를 기꺼이 이용해줄 때 우리의 삶과 지구는 지속가능하다. 녹색경제를 내세운 정부 당국은 그런 일상의 영역에서부터 미시적인 순환의 경제를 도모해야 마땅하다.


김찬호|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박사를 취득하고 대학에서 문화인류학과 교육학을 가르치고 있다. 학교 바깥에서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가족 관계, 디자인, 청소년 교육, 부모교육, 마을 만들기, 창의성, 한국문화론 등에 대해 강연을 하고 있다. 저서로 [사회를 보는 논리] [도시는 미디어다] [문화의 발견 : KTX에서 찜질방까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