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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09 09-10 마을, 다시 피어나다

마을, 다시 피어나다 3 l 도심 속, 일상의 혁명을 함께 이루어가. 성미산 마을


도시의 삶이란 어떤 걸까? 칸칸이 나뉜 아파트에 살고, 각자의 집에서 자기 식구들끼리만 식탁에 앉아서 저녁을 먹는 모습? 어쨌거나 삭막하고 개인들이 각자 알아서 살 것 같은 그런 곳이 도시인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 마을’의 모습은 무엇일까? 마당이 있는 집, 사람들끼리 마실을 다니는 모습, 함께 평상에 앉아서 전을 부치고 막걸리 한 잔과 함께 저녁을 먹는 그림 등이 떠오른다. 그런데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러한 삶의 형태를 서울 한 복판, 마포에서 이뤄가는 마을이 있다.



뜻이 마을을 낳고, 마을이 삶을 낳다

성미산 마을은 1994년에 공동 육아를 위한 ‘신촌지역 어린이 마을’에서 시작했다. ‘또 하나의 문화’와 조한혜정 연세대학교 교수가 이러한 공동 육아를 제안했다. 직장 때문에 아이를 집에서 계속 보고 있을 수도 없고, 다른 어린이 집은 너무 비싸고 믿을 수도 없었던 엄마 아빠들, 20가구가 ‘어린이집’으로 모였다. 선생님들은 교육에 대한 책임을 지고 엄마 아빠들은 운영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어린이집이 시작되었다. 이들이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성미산 마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이들은 매일 성미산에 가서 산의 곳곳에 자기들이 이름을 붙이고 뛰어놀았다. 성미산의 마을은 산자락의 부분들이 아니라, 이름이 붙여진 특성이 있는 다양한 공간들의 합이 되었다. 그런데 서울시가 배수지 공사를 하겠다고 산을 파헤치려 했다. 산이 없어지면 아이들은 어디에서 뛰어 노누. 아이들의 학습장은 붕괴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엄마 아빠들은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3년 동안 싸워서 결국 서울시를 항복시켰다. 오히려 성미산 마을은 2007년 건설교통부가 지정하는 ‘살고 싶은 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엄마 아빠들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존 학교에서는 유기농 식단을 유지하기 어렵고, 서로 경쟁 없이 돌보며 존중하는 것을 배운 아이들이 상처받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엄마 아빠들은 서로 상호출자를 통해서 2004년 ‘성미산 학교’를 만들었다. 성미산 학교는 초, 중, 고 12년 과정을 운영하는 대안학교가 되었다.
아이들이 먹는 식단에 계란을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도 논쟁거리였다. 아토피로 아픈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음식의 안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두레 생협’이 2000년 생겨났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골라 사서 먹이기에 각각의 가정은 취약하다. 마을 사람들의 협동조합인 두레 생협은 그러한 기대를 충분하게 채워줬다. 그리고 유기농 음식이 몸에 좋지만 맛은 없다는 선입관을 극복하고 또 반찬 차리는 것이 일인 가정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 힘을 모아 유기농 반찬가게 ‘동네부엌’을 만들었다.

성미산 마을극장 유창복 대표


경계를 넘나드는 소통을 위한 마을 극장

성미산 마을의 성공사례가 여기저기 알려지면서 성미산 마을이 마을 사람들에게 너무나 좋은 숨 쉴 터울이 되지만, 동시에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그 울타리가 높게 느껴진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중산층 중심의, 있는 사람들의 폐쇄된 마을이라는 소리도 나왔다. 마을에서 ‘짱가’로 통하는 유창복 씨는 이런 고민 중에 울타리를 아예 없앨 수는 없지만 그래도 좀 문턱을 낮춰 서로 드나들기 쉽게 해야겠다 생각했고, 안 그래도 성미산 마을 축제를 계속 기획하면서 문화예술에 관심 많았기에 극장을 만들고 마을극장 대표가 되었다. “축제는 매일처럼 하려면 힘들지만 극장은 누구든 쉽게 갈 수 있는 그런 장소니까요.” 아마추어 밴드라는 엄마아빠 밴드, 무말랭이라는 연극반, 문예사진관이라는 사진반, 물뜨네라는 영상팀, 드로잉팀, 인형극, 노래패, 풍물팀, 인문학 스토리텔링 공부하는 팀 등,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아 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모여 만들어진 동아리들이 마을에 여러 개 있었다. 이러한 동아리들을 통해서 맺는 사람들의 친밀성은 새로운 관계성을 만들어냈고, 극장은 이를 소통하는 장이 된 것. 마을 극장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마치 동아리를 만들었듯이. “그냥 만들고 싶으니까 만들겠다고 하고, 그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였죠.” 서로 돈을 출자하고 금액이 어느 정도 모이고서는 바로 설립의 구체적 절차를 시작했다고 한다. 운영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사회적 일자리로서의 임금을 주고, 수익들은 서로 나누고 또 대출금을 상환하는 데 쓰인다. 성미산 마을 극장은 그야말로 다목적이다. 어떤 날은 전시가, 어떤 날은 영화 상영이, 또 어떤 날에는 마임과 콘서트가 열린다. 극장에는 매트로 된 블록들이 있다. 그걸 다 치우면 스탠딩 콘서트를 할 수도 있고, 블록을 쌓으면 테이블이 되었다가 의자가 되기도 한다. 그 곳엔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도 없다. 따로 또 같이 하곤 하니까 말이다. 아마추어들과 함께한 프로들은 또 다른 영감을 얻고, 아마추어의 공연을 보는 사람들은 “아니, 저 아줌마도 하잖아?”라며 스스로도 용기를 얻고 자신들이 표현하고 싶을 때 스스럼없이 극장을 찾아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고.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사설 극장이 아니기에 다른 곳들보다 저렴한 이곳의 대관료는 홍대 근처의 인디 아티스트들이 쉽게 찾을 수 있고, 더 많은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취재를 나간 그 잠깐 사이에도 대관을 위해 들른 젊은 아티스트들과 사회적 일자리로 채용된 스텝들이 극장 대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함께 춤을 추고 싶다면, 먼저 춤을 춰봐

①성미산 어린이집 공동육아를 통해 운영하는 어린이집 ②성미산 학교 초, 중, 고 12년 과정을 운영하는 대안학교 ③두레생협 서로 도와주는 마을의 전통인‘ 두레’를 살린 생협 ④되살림가게 재활용품 가게

요즘 ‘마을’, ‘동네’에 대한 바람이 불면서 성미산 마을이 그 모델, 혹은 선두주자로 불리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마을을 꿈꾸는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을까. “ 저는 ‘마을 만들기’라는 말은 안 썼으면 좋겠어요. 마치 마을을 만드는 주체가 있고, 어떤 프로그램이 있는 것처럼 인식되니까요. ‘마을 하기’, ‘마을 살이’라는 말이 좋을 것 같아요.” 성미산 마을이 여기까지 ‘마을 하기’를 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성미산의 모든 것들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성미산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함께’해서 성공적으로 만들어본 경험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 동네’와 ‘동네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었죠.” 그는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사람들을 설득하지 말라고 한다. 그냥 함께 놀자고 하면 좋겠단다. “같이 춤추고 싶으면 그 사람이 먼저 춤을 추면 되요. 그러면 누군가는 미친 사람 취급하기도 할 테지만, 동시에 또 어떤 이는 멋있다며 함께 출 거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까지 이룬 성미산 마을을 전체적인 묶음으로, 결과로만 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하나 하다 보니 된 것이지, 거창하게 누군가가 무언가를 기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미산 마을이 단단하게 운영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만들어진 신뢰, ‘품앗이’와 ‘두레’의 전통이 그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스터플랜 같은 거 세우지 말고 그냥 하라는 거
죠. 예전에는 무언가 나와 같아야 하고, 다르면 배제시키는 윤리관이었다면, 이제는 차이와 공존의 가치를 존중하는 윤리관을 터득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지금까
지 어떤 거대한 제도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이제는 그거 말고도 다른 대안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죠. 육아를 고민하다가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만들게 된 것, 생각해보면 이것도 혁명적이지 않나요?” 성미산 마을의 힘은 거기에 있었다. 삶의 현장에서 나와 너, 우리가 더욱 건강한 대안적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직접 해소해 가는 과정, 그것에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는 것.

성미산 학교와 어린이 집의 아이들은 서로 이름이 아닌, 닉네임을 부른다. 유창복 씨 역시, 아이들이 “짱가!”하고 부른다. 수평적인 소통을 위해서다. 반팔 라운드 티에 반바지, 그리고 슬리퍼를 신고 나타난 짱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예전의 유교적인 마을이 아닌, 도시에서의 발랄하고 자유로운 영혼들의 마을은 어떤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도 성미산 마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즐거운 상상을 하고, 얼마 지나서는 그것들이 실현되어 또 하나의 성미산의 무언가가 되어있을 것이다.  글 양승훈|사진 노영신

⑤동네부엌 믿고 살 수 있는 유기농 반찬 가게 ⑥카페 작은나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출자하여 만든 공동체 카페 ⑦성미산 마을 극장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펼쳐지는 마을복합문화공간







우리동네,우리방송
마포FM
송덕호 대표


동네 이야기는 TV나 신문에 나오지 않는다. ‘6시 내고향’에나 나오려나. 재개발 문제가 동네에서 생겨나도 중앙의 미디어는 기껏해야 경찰이 강경하게 진압을 할 때 하나의 ‘사고 기사’로 처리할 뿐이다. 그 전개 과정을 심층보도하지 않는다. 일일이 다 어떻게 하나. 그래서 지역에서, 마을에서, 동네에서 일어난 일들을필요에 의해서라도 좀 동네 사람들이 알게끔 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사실 ‘구민 회보’ 등의 것들은 있어왔지만 거기엔 시민들의 목소리는 잘 없었다. 기껏해야 구청장의 동정과 구청에서 하는 사업에 대한 소개 아닌가. 그런 필요를 바탕으로 ‘우리동네 우리방송’이라는 모토 아래 활동하고 있는 마포FM을 찾아 송덕호 대표를 만났다. 2004년 공동체 라디오 송출로 시작된 마포FM은 마포 전 지역에서 100.7MHz를 맞추면 아침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들을 수 있다. 송 대표는 “지역이 지역 유지 중심으로 돌아가고 일반 주민들의 의견이 배제되는 식”으로 돌아가는 현실에서 “ 지역이 제대로 살아있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나 이런 것들은 굉장히 흔들리기 쉽”기에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해 방송을 시작했다. 마포FM에서는 동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를들을 수 있다. 동네 아줌마의 노래자랑부터 주민들이 지역에서 겪는 애로사항까지. 마포FM에는 시시하다고 무시당하지 않는다. 같은 동네 사람들 이야기니까. 성적 소수자나 노인들의 문제도 항상 편견없는 시선에서 다루려 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사회적 일자리로 10명을 고용하고 있다. ‘연대’와‘ 나눔’을 통해서 함께 하는 방송국을 운영하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마포FM에서 방송 활동을 하고 싶으면 활동가 지원을 하고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고 나면 기획에 따라서 활동하고 활동비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활동가로 뽑히는 것은 지역주민들이라고 한다. 이젠 구청에 찾아가면 ‘송덕호의 쌈빡 시사’하면서 알아보는 공무원도 있고, 동네에서 마포FM 하면 좀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모두 즐겁게 일하면서 사람들이 조금씩 서로 알아가는 게 어느 순간에는 큰 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동네 누가 살고 어떤 사람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요?” 내가 궁금한 걸 알려주는 동네 라디오, 마포FM. 시샘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