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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09 09-10 마을, 다시 피어나다

마을, 다시 피어나다 4 l 사라져 가는 이야기들이 머물다 _인천 배다리 마을

배와 배를 나란히 잇달아 띄워 사람이나 물건을 건널 수 있게 했다는 유래를 가진, 인천 배다리 마을. 1892년 국내 최초의 사립학교 영화학교 개교, 1897년 경인철도 부설, 1920년대 성냥공장 밀집지역, 1920년 전국적 명성의 소성주(소주의 일종)를 제조했던 인천양조장, 개교 100돌을 넘긴 창영초등학교, 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헌책방 골목 등 개항 이래 근대 인천의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이다. 각처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던, 고단하지만 정겨웠던 삶의 자리와 그 흔적들이 남아있는 이곳이 몇 년 전부터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인천시가 송도경제자유지역과 서울을 잇기 위해 배다리 마을을 관통하는 폭 50m의 6차선 도로 건설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그 계획대로라면 배다리 마을은 도로 때문에 반으로 갈라지게 된다. 헌책방 거리를 비롯한 배다리의 골목과 집들을 밀어낸 뒤에는 주차장, 각종 위락시설, 주상복합 아파트 등을 짓겠다는 것이 인천시의 계획. 무더위가 한창인 8월의 어느 날, 카메라를 덜렁 매고 그 마을을 걸었다.

낡고 따뜻한 이야기가 머물다
_배다리 헌책방 골목

배다리 초입에 있는 헌책방 거리. 1970~80년대만 해도 50여 개가 넘는 서점들이 호황을 누렸지만 지금은 6곳 정도가 남아있다. 빛바랜 책들이 가게 문턱을 넘어서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고른다. 누구도 베스트셀러라며, 추천도서라며 읽기를 권유하지 않지 않는, 내가 찾아가는 책을 만나는 곳.

마을을 지키는 예술_스페이스 빔
인천의 대안예술운동을 이끌고 있는 ‘ 스페이스 빔’. 이들은 지난 2006년 배다리가 한창 시끄러울 때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1920년에 지어진 인천양조장 건물에 살고 있는 스페이스 빔 내부를 돌아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이 배다리를 어떻게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인지를….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인간이 쌓아올린 이야기들을 파괴하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를 되묻는다.

마을을 가꾸는 예술_퍼포먼스 반지하
배다리 곳곳에 숨겨놓은 듯 발견하게 되는 아름다운 벽화들을 그린 ‘퍼포먼스 반지하’가 운영하는 마을카페. 마을카페는 각자 차를 타 마시고, 낼 수 있는 만큼 돈을 내고, 컵을 씻고 가는 시스템이다. 마치 친한 이웃집에 들려 차 한 잔 얻어 마신 기분. 배다리 마을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예술로 볼줄 아는 사람들의 지난 작업 이야기도 언제든 들을 수 있다.

마을의 텃밭
집 마당이 텃밭이 되고, 집 앞이 화단이 되는 마을 곳곳의 풍경. 내가 먹을 채소를 기르는 것, 좋아하는 꽃을 키우는 것이 모두 마을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 된다. 텃밭을 가꾸며, 화단을 만들며 이 땅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마음을 엿보는 것 같다.

집이 되고, 일터가 되다
_마을의 가게

이곳에 터를 잡고, 나만의 일을 해온 지 십 수 년. 장사가 잘 되든 안 되든 이곳은 누군가 함부로 가치를 말할 수 없는 이들의 일터이자 집이다. 양복을 지으며, 음식을 만들며, 명패를 새기며 쌓아온 노하우로 이들은 이미 누구나 ‘생활의 달인’이다.

배다리 에코파크
주민들 반대로 공사가 중단된 지 2년. 도로를 내기 위해 오래된 집과 가게들을 부숴 정리한 공터는 각종 들풀과 꽃, 곤충들을 만날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공원이 되었다. 때때로 공연이 펼쳐지기도 하고, 생태캠프가 열리기도 한다.


주민들과 지역문화운동 단체들은 2007년 3월 ‘배다리를 지키는 인천시민모임’을 결성하고 산업도로 건설사업 백지화 운동을 전개해왔다. 산업도로가 유서 깊은 거리와 옛 건물들을 밀어낼 뿐 아니라, 배다리 마을을 양분해 고유의 생활공간을 깨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이곳을 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지 않으면서, 이곳의 존폐를 쉽게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곳을 지키고 싶은 사람도, 이곳을 떠나고 싶은 사람도 다 나름대로의 삶의 이유와 자리가 있으며, 모든 사람의 삶의 가치가 같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가 사라지게 하는 것들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경제적인 이익과 획일적인 편리함이 더 가치 있는 것인지는 더 멀리보고 생각해야할 문제임에 틀림없다. 똑같은 시멘트로 만든 벽인데도, 왜 이 곳엔 담을 넘어 음식냄새가 오가고, 마음이 오가고, 이야기가 오가는지 갑작스레 궁금해지는 오후의 산책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