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PECIAL/2009 09-10 마을, 다시 피어나다

마을, 다시 피어나다 5 l 지역화폐 ‘두루’, 행복한 마을을 지불하다_지역품앗이 한밭레츠


지금 당신의 지갑 속에 100원 짜리 동전 하나 없다면 당신은
어떤 기분이 드는가? 어깨가 조금 처지고, 의기소침한 기분이들지도 모르지만, 별로 걱정할 건 없을지도 모른다. 손바닥보다 작은 카드 한 장이면 지금 당장 따뜻한 밥 한 끼 사 먹는 일도, 마음에 드는 옷 한 벌을 사는 일도, 택시를 타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되갚을 능력이 없다면?
아마 자의든, 타의든, 우리의 소비는 멈추게 될 것이다. ‘벌지 않으면 쓸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듯한 이 시대의 명제 앞에, ‘마이너스 통장’을 오히려 칭찬하고 격려하는 마을이 있다. 너무 많이 가진 사람도 없고, 너무 덜 가진 사람도 없이 통장의 합계가 “0원”이 되는 것이 원칙인, 특별한 통장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대전으로 향했다.

관계를 통해 필요를 채우다
#1. 회사원 송미영 씨는 얼마 전 민들레 치과에서 어금니 충치치료를 받고, 1만 5천원의 진료비를 1만 5천 두루로 계산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치료의 경우에는 전액 ‘두루’로 지불할 수 있기 때문. 덕분에 마음 편히 치과에 갈 수 있었다.
#2. 주부 이종현 씨는 그림 그리는 봉사를 통해 벌어둔 ‘두루’로 딸아이가 가져온 햄스터의 집을 구매했다. ‘두루’로 얻은건 햄스터 집뿐만이 아니었다. 전업주부로서 뭔가 할 수 있다는 성취감과 내 노동력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두루’는 대전시 대덕구 법1동에 자리 잡은 ‘지역품앗이 한밭레츠’ 회원들이 사용하는 지역화폐의 이름이다. 대전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소정의 교육을 받은 후 한밭레츠의 회원이 되어, ‘두루’를 사용할 수 있다. ‘널리 또는 두루두루’라는 뜻을 담은 순수 우리말인 ‘두루’는 형태가 없는 가상의 화폐로, 한밭레츠 안에서 법정화폐와 같은 효력을 가진다. 천 두루는 현금 천 원과 같은 가치로 식·의·주기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거래는 물론 의료, 재활용, 교육, 서비스 등 다양한 형태의 노동과 재화를 교환하는데 쓰인다.
교환가치로 쓰이는 이 ‘두루’의 사용법은 좀 특이하다. “‘ 두루’는 현금과 달라 꼭 먼저 벌어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벌지 않아도 쓸 수 있고, 번 것보다 많이 써도 상관이 없어요. 내 마이너스는 누군가의 플러스가 되기니까요. 그래서 한밭레츠의 전체적인 재정 상태는 항상 ‘0’이에요.” 협력두루지기 이종현 씨의 말이다. 내 마이너스는 품(노동)이나 물건을 다른 회원과 거래하고 ‘두루’를 벌어 차차 갚아나가면 된다. 물론 이자도 없다. 한밭레츠의 초기멤버인 김성훈 실장은 ‘두루’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사람이든지 관계를 맺고 살아가잖아요. 관계가 이어지다보면 제가 필요한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고, 제가 가진 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그 관계를 토대로 서로 필요한 걸 나눌 수 있게 되죠. 돈이 없어도 필요를 채울 수 있게 됩니다.” 관계를 살리고, 삶을 나누며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 한밭레츠 회원들이 함께 누리고 있는 행복이다.

사람을 품고, 사랑을 나누는 화폐

1998년 IMF 때부터 시작된 한밭레츠는 교환의 매개수단으로서의 돈을 마을에서 만들어서 나눠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2008년을 기준으로 회원 수는 620여 명, 거래건수는 10,569건, 거래액은 두루와 현금을 합쳐 1억 8천만 원으로 거래액 중 ‘두루’ 비율은 53.0% 정도다. 2000년에 비해 거래건수는 약 36배, 거래액은 18배 정도가 증가한 수치다. 아직 완벽한 경제조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니지만, 거래건수와 ‘두루’ 사용량이 매년 늘고 있고, 어린이 봐주기와 교육, 대체의료 등 새로운 형태의 거래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 그럼 ‘두루’를 쓴다는 것이 실제 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지출은 줄었지만, 더 넉넉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게 됐어요. 대형할인마트를 가는 대신 한밭레츠를 이용해 그때그때 유기농 농산물을 먹을 만큼만 사서 먹으니 못 먹고 상해서 버리는 게 거의 없어졌죠. 그리고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홈페이지에 등록하고 마땅한 물건을 기다리는 동안 정말 필요한지에 대해 다시 곰곰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협력두루지기 이종현 씨의 말처럼,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는 줄이고, 지역 안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힘을 키워가는 것이 ‘ 두루’의 원리다. 활동회원들은 주로 주부들이 주축이 되고 있지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축은 경제적으로 소외된 노인들이다. 얼마 전에는 사회적일자리창출사업으로 ‘두루잔치’라는 외식업체를 만들어 55세 이상의 주부 10명이 함께 일하고 있고, 이들은 한 달에 2번, 독거노인들에게 밑반찬 자원봉사도 하고 있다. ‘맥가이버’라는 애칭을 가진 75세 할아버지는 품앗이 소모임을 통해 기술을 전수받아 재활용 빨래비누 사업으로 자립을 하셨다. 이뿐 아니라 한밭레츠 회원 중 한방과 양방 의사들이 모여 만든 ‘민들레의료생협’에서 진행하는 하얀민들레, 달빛산책, 건강달리기 등 여러 가지 건강모둠 활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두루’가 지급된다. 마을의 건강은 건강한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들이 세계적으로도 10년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지역화폐를 건강하게 이어온 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성경에서 말
하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의 모습처럼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마음을 같이하고, 함께 떡을 떼며, 기쁨을 누리며 쌓아가는 신뢰. 돈이 곧 행복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그런 순전한 기쁨을 누리며 더불어 행복한 공동체를 지켜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소망이 생긴다. 바라보고, 배울 대상이 있을 때 그곳으로 나아가기가 더 쉬우므로.   글ㆍ사진 정미희



지역품앗이 한밭레츠
대전광역시 대덕구 법1동 282-9 3층
042-638-2465
www.tjlet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