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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매거진<오늘>/문화선교연구원

성경적 영화읽기를 위해 갖추어야 할 시각


아무런 의식 없이 영화를 보는 것은 운전면허 없이 차를 모는 것과 다름없는 정말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입학시험 보듯 초긴장 상태에서 영화를 보라는 것은 아니다. 재미와 흥미를 가지고 보되,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를 가지고 영화를 관람하라는 것이다. 영화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영화의 문제해결 방식은 성경적 이었는지, 이 영화는 나의 생각과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함께 영화를 본 친구들이나 연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교회 성경공부 시간에 주제토론을 통해서, 또한 영화에 대한 소감문을 적어 봄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구체화시킬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영화를 볼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을 점검해 봄으로써 바른 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보려 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1.재미있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 영화를 포함한 대중문화의 큰 문제 중의 하나는 현대인의 쾌락추구행위를 무분별하게 가속화시키는데 있다. 물론 ‘재미’를 추구하는 기능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규범화되고 ‘이윤추구’라는 상업성에 의해 극단화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된다. 무조건 팔리면 그만 이라는 식의 논리에 따라 실정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에서 ‘재미’만 있으면 되고, 그래서 팔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선정적이든, 퇴폐적이든, 비교육적이고 야만적이든, 저열하고 비도덕적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 요즘 개봉되는 영화들을 살펴보면 ‘영화를 위한 재미’인지, ‘재미를 위한 영화’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스토리, 작품성, 완성도 등을 무시하고 오직 재미만을 추구하는 영화들이 많이 상영되고 있다.
이처럼 재미의 이데올로기 체제 속에서 만들어진 영화나 비디오를 계속해서 보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재미의 논리’에 빠져들게 되고 모든 생활영역에서 재미가 없는 것은 거부하는 일종의 중독현상이 발생한다.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첫 번째로 던지는 질문이 “그 영화 재미있냐?”이고 재미가 없다고 하면 작품성을 떠나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시해 버리는 우리의 행동은 재미의 중독현상이 벌써 우리의 몸에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학교에서도 재미있는 선생님만 좋아하고 친구들도, 연예인들도, 심지어 부모님들까지도 재미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리모콘의 정지버튼을 누르고 다른 테잎을 집어넣듯이 우리들은 대상을 즉각 바꾸거나 싫어하는 태도를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선생님이나 부모님이더라도 재미가 없으면 우리들로부터 찬밥신세가 되는 것이다. 또한 재미의 추구는 속성상 대상과 방식을 차츰 확대해 간다. 일상의 단조로움과 권태로움을 소거할 수 있다면 그것이 비관적이고 냉소적이든, 허무적이고 말초적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즐거움과 웃음을 유발시킬 수만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2000년의 주요 문화코드는 엽기였다. 재미만 있다면 어떤 소재도 가리지 않고 괴이한 것을 즐겨 찾아다니는 엽기신드롬이 한 해를 달구었다. 결국 ‘재미의 논리’에 의해 양육되어 ‘재미’에 중독된 현대의 젊은이들은 윤리와 규범에 구애됨이 없이 어떻게든‘기발’하고 ‘새로운’재미를 찾기 위해 인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는 그러한 행위를 신세대의 개성이라고 합리화시킨다.
물론 영화 한 편, 비디오 한 편이 우리들을 이렇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텔레비전-음악-잡지-컴퓨터 오락 등의 대중매체들이 ‘재미의 논리’를 위해 전폭적인 지원사격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재미만을 추구하는 영화, 비디오시청은 우리들을 더 빨리 ‘수렁의 늪’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쁨과 감동과 교훈이 없는 재미는 우리들을 ‘재미의 악 논리’에 빠지게 만든다. 일단 그 논리에 빠지게 되면 속성상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재미는 마약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당신도 얼마 있지 않아 이러한 재미의 속성에 사로잡혀 재미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2. 인기 있는 것만이 최고는 아니다.
과거의 문화가 규범과 의미체계의 준거의 틀( frame of reference)로서 사회성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면, 현대의 대중문화는 그와 반대로 대중의 취향에 의해서 생성되고 퇴락한다. 즉 팔려야만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고 인기가 없는 문화는 그 내용과 본질에 관계없이 도태되는 것이다. 영화와 비디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개봉관에서 잘 나간다는 영화들은 3일 전에 예약해야만 겨우 볼 수 있고 흔히 ‘대박’이라고 불리는 인기비디오는 전국 어느 비디오가게에 가도 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대량으로 공급되지만 YMCA나 기독교 문화잡지에서 추천하는 영화들은 출시되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 비디오 가게에서는 만나기가 어렵다. 문제는 영화나 비디오의 대박들이 앞에서 말한 재미의 논리와 텔레비전에서 충족하지 못한 섹스와 폭력의 욕구를 혼합시켜놓은 건전하지 못한 영화들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런 의식 없이 남들이 즐겨 찾는 영화나 비디오를 봄으로서 그 해악까지도 함께 누리는(?) 폐해가 생기는 것이다. 베스트 셀러가 다 좋은 책은 아니듯이, 많이 보는 영화가 다 좋은 영화는 아니다.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고려하지 않고 ‘어쨌든 인기만 있으면 된다’, ‘인기가 있는 것이 바로 가치 있는 것이다 ’라는 논리는 토크빌이 지적한대로 ‘다수의 횡포’일 뿐이다. 현실이나 사실 그 자체가 윤리적 당위성이 되는 이른바 ‘인기의 논리’는 현대 상업주의 문화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하나의 병폐인 것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 넓고 평탄해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는 길이기에 외롭지 않은 여행처럼 보이지만 종착역은 어김없이 꺼지지 않는 유황불이 기다리고 있는 지옥일 뿐이다.
장차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인기 있으면서도 좋은’ 영화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이지만, 이 세상은 ‘인기 있으면서도 나쁜 영화’를 더욱 더 많이 만들고 있다. 부디 분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비록 인기는 없더라도 내용 있고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영화들을 소비해 줌으로써 그러한 영화들이 도태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3. 요모조모 따져봐야 한다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즉각적인 충족감을 지향하도록 만들고 있다. 실제로 현대 대중문화의 대부분이 깊은 사고를 요구하기보다는 감각적이고 직관적이며, 내성적 (內省的)이기보다는 말초적이고, 지혜보다는 단순정보에 의해 이루어짐을 일상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문화의 기본적인 목적 중에 하나가 기분전환 (diversion) 이나 소일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성적인 것’ 조차 ‘기분’의 차원으로 환언시키는, 그래서 조금이라도 어렵거나 지적인 노력이 요구되면 배척해 버리는 문화적 수용성이 사회전반에 확산된다는 것이다. 즉, 이성과 지성과 논리, 그리고 윤리와 가치를 ‘복잡하고 골치 아픈 거’, ‘어렵고 피곤하게 따지는 것’, ‘꽉 막히고 답답하고 고상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인식할 뿐 아니라 그러한 반지성적 태도를 일종의 유행으로 혹은 시대적 풍조로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라고 하겠다. 요즘 소위 N세대라고 부르는 계층들이 윤리나 도덕에 관계없이 자기방식만을 추구하려 하는 것도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영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영화는 엄연히 현실과 구분되는 가공의 상황인데 뭐 피곤하게 폭력성이니 음란성이니 하며 그 내용을 따질 필요가 있느냐? 또 설사 내용 중에 조금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내 우울한 기분과 감정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됐지 그 영화의 사상이 어떻고 영향력이 어떻고 따지는 것은 할 일없는 평론가들이나 할 일이다” 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중에도 의외로 많다. 즉 베토벤을 듣던지 HOT를 듣던지, <벤허: Ben -Hur>를 보던지 포르노를 보던지 내 마음에 들고, 내 기분을 만족시켜주고, 남에게 직접적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됐지 뭘 그렇게 따지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례와 연구가 대변해주듯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잠재적 영향력은 우리의 정신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병들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 음악, 텔레비전에 숨겨져 있는 내면의 메시지를 분석하고 판별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더군다나 가치관이 채 형성되지도 않은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문화를 아무런 여과 없이 노출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영화 속에 담겨있는 내용에 대해 분석해 보고, 사상의 기저, 영향력 등을 요모조모 따져보아야 한다. 여기에 사용되는 영화분석의 대원칙은 “예수님이라면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을까?”이다. 예수님의 시각에서 우선 영화를 분석해 본 다음 예술성이나 작품성, 교육효과, 정서에 미치는 영향력 등을 따져보는 것이 영화를 보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이다.

4. 영상에 그려진 현실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다른 것이다
무엇인가가 화면에 ‘보여진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주는 개념이다. 첫째, 영화바깥의 세계로부터 우리를 격리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현실’과 ‘자신’이라는 주체를 잊고 ‘관객’이라는 객체로서 영화에 빠져드는 것이다. 둘째, 화면의 시작은 다른 인식작용을 차단하고, 무시하고, 가로막는 일종의 최면행위로 파악된다. 즉 관객들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영화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논리대로, 주어진 영상대로 그저 바라만 보는 인식의 마비현상 속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다.
이 두 의미를 종합해 볼 때 관객은 영화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다르다는 전제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하지만 영화의 장면이 흐름에 따라 그 속의 현실을 마치 현실의 재현인양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영화의 시작도 아니요 중간도 아닌 영화가 끝난 뒤 관객의 모습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의 끝을 알리는 음악과 함께 겉으로는 현실이라는 보금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그의 내면 속에는 영화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많은 가치와 행동들이 내재되어 있어, 주위의 환경변화나 자극이 주어졌을 때 그러한 행동이 불쑥 튀어나오게 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을 통해 즉각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들을 제어하지만, 제어능력이 부족한 성인들이나 특히 청소년들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까지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는 ‘행동화 현상’을 보이게 된다. 
우리는 흔히 영화가 끝난 후 “그건 영화에 불과해”라고 말하지만 과연 우리를 화나게 하거나, 승리의 쾌감에 젖게 하거나, 혹은 눈물을 흘리게 하거나,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경험들이 우리의 잠재 의식적인 태도들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처럼 우리가 보는 영화들은 우리의 잠재 의식적인 태도를 형성하고 공고히 하고 변화시키는 역할들을 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영화를 관람해야 할 것이다.

5. 영상 뒤에는 그 영상을 만든 사람의 의도가 있다
영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영상의 작가가 왜 그러한 내용을 그런 방식으로 전달했는지 나름대로 작가의 의도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단순히 보여지는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 이면(裏面)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우리들이 파악할 수만 있다면 보여지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맹목적성은 지양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감각기관의 불완전함, 곧 착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예술양식인 만큼 체제나 권력, 자본의 유지와 이익, 나아가 제작자의 계략을 위해 영화가 사용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이 작업이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실제로 그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우리 자신도 능력이 부족함을 실감한다. 언뜻 생각하면 <낮은 울타리>, <빛과 소금>, <문화선교연구원> 등에서 하고 있는 일이 매우 단순한 일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시각에서 영화를 모니터하고 성경말씀을 토대로 단평(短評)을 붙이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특히 왜 이 영화가 나쁜 것이고 추천될 수 없는 지를 구분하는 작업은 많은 사고와 기도를 필요로 한다. 영화적인 요소와 작품성을 논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작품 속에 내재해있는 메세지를 분석하는 일은 결코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선과 악을 분별케 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도 아니요 학식도 아닌 오직 성령님의 능력이다. 내 시각과 능력만을 가지고는 영상 이면에 내재한 비기독교적 가치관을 판별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현명한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6. 영화를 보는 올바른 시각을 지녀야 한다.
우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영상문화는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많음을 알아야한다. 한 달에 평균100여 편씩 출시되는 비디오 중에서 기독교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는 손으로 셀 수 있는 범위를 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대부분의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비디오를 접함에 있어서는 긴장하여 분별력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대치성 문화허용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음란성 영화보다는 폭력물이 그래도 낫다는 생각으로 자녀들에게 허용한다는 것은 큰아들을 위해 작은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이상하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섹스’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폭력’에는 둔감하고 자비로운 태도를 지니고 있다. 영화의 관람 등급을 결정하는 위원회의 심의 규정을 보아도 성에 관한 규제가 더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다. 물론 음란과 폭력은 우선순위를 가려가며 선택할 수 있는 부류의 것들이 아니다. 이들은 마땅히 추방되어야 할 쓰레기와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음란비디오는 예술이라는 명목으로, 폭력물은 액션이라는 포장을 하고 우리의 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는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만화영화니까 괜찮겠지, 전체 관람 가능 등급이니까 괜찮겠지 하는 부모의 확신 없는 허락은 오히려 아이들을 폭력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가능성이 농후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좋은 영화를 통해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기독교적인 영화관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여기에서 좋은 영화란 기쁨과 감동과 재미, 그리고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교훈을 지닌 영화를 일컫는 말이다) 사실 지금까지 언급했던 여러 가지 사항들을 말로서 지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고 직접 영화를 통해 영화 보는 법을 가르쳐야지 말이나 글로써 교육한다는 것은 수박 겉 핥기요, 소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다. ‘성경적 가치관에 입각한 영화읽기’라는 자체가 다소 생소한 시도이긴 하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사용하여 영화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면 영상시대를 살아가는 기독 청년으로서 좋은 공부가 되리라 생각한다.

“한 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수백 번도 더 들었을 법한 귀찮은 소리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쁜 영화와 비디오가 사람의 미래를 어둠으로 몰고 갈 수 있듯이, 좋은 영화와 비디오는 사람의 미래를 밝혀줄 수 있는 등불로도 사용될 수 있다. 물론 한 구절의 성경말씀이 한편의 비디오보다는 더 밝은 등불이 될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영화 보는 것과 하나님이 주신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이 사회는 눈이 부셔 살 수 없을 정도로 빛을 밝게 비추는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생각해 볼 문제들
1. 자신이 본 영화를 친구에게 소개할 때 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말합니까?

2. 영상에 그려진 현실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혼돈한 사례를 찾아보십시오.

3. 최근 1달동안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던 영화들과 비디오들을 조사해보고 그 이유는 무엇인 지 토의해 보십시오.

4. “기독교적 관점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시선으로 영화를 가두기만 하면 결국 우리가 눈으로 보는 영화란 그저 위험한 흉기로 밖에는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5. 자신이 최근 관람한 영화는 과연 어떤 의도로 만들어 졌을까 한 번 생각해보고 실제 제작자나 감독들의 의도를 조사해서 비교해 보십시오.

박한철|멋진 영화와 성경 말씀을 통해 사람답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덕성여고의 사회 선생님.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살아남는 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글을 쓰고 있으며 문화선교연구원의 전문위원으로 돕고 있다. <감성세대의 영화읽기>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