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매거진<오늘>/문화선교연구원

영화 <어둠의 아이들>

어둠의 아이들
(사카모토 준지 감독, 2010)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한계는 극복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아마도 과학기술의 진보와 그 결과들을 경험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한다. 한계란 과학기술의 한계일 뿐이며, 그러므로 한계란 당연히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한계는 단지 극복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불어서 살아가야 할 혹은 그 일부로서 포함되어 있어야 할 환경일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인간은 한계를 극복하기보다는 한계의 범위에서 최선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흔히 한계로 설정되는 것은 죽음과 생명의 문제이다. 생명과 죽음은 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은 이것들에 대한 인간의 자의적 판단을 금한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과학 기술의 한계로 보는 입장도 있다. 유전자 정보를 해독하고, 생명의 역학관계를 풀어내어 생명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면서 생명의 문제는 더 이상 한계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물론 영원히 사는 문제는 여전히 풀 수 없는 숙제이지만, 원하는 형태의 생명을 만들어내고,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은 개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아직은 법적인 규제로 과학자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 기술적인 잠재력은 갖추어져 있는 상태다. 
생명복제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과연 생명공학의 혜택은 인간 모두에게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본의 힘에 좌우될 것인가? <어둠의 아이들>(사카모토 준지, 2010)은 태국의 아이들이 성적인 폭력에 어떻게 노출되어 있고, 또 그들이 서구 자본주의의 폭력에 의해서 어떻게 학대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고발한 매우 충격적인 영화다. 무엇보다 감금된 상태에서 짐승과 같이 다뤄지는 아이들이나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장기가 적출되는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든 장면이다. 인간의 욕망과 이기적인 사고에 대해 이토록 심한 거부감을 느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서구의 강력한 군사력과 거대 자본력에 의해 거듭해서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되는 아시아인의 비극적인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아니, 폭력의 피해자 당사자인 아시아인조차도 폭력을 반복하고 있는 불행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성 매춘과 성폭력에 노출된 어린아이들의 인권도 문제이지만, 더욱 큰 충격은 장기이식을 위해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이들에게서 하나밖에 없는 심장을 적출하는 현실이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죽이는 일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뤄지는 것일까? 가족이기주의에 따른 판단이며, 자본이면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는 자본도착증이 아닐 수 없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서 폭로되는 인간의 모습에서 죄의 단면을 보게 된다.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로 나서지 않고 단지 보기만 하는 자들은 모두 공범일 수밖에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동성매수자에 대한 신문기사들과 함께 거울에 비친 모습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닐까? 비록 직접적인 공범은 아니라도 보고도 움직이지 않는 우리들 역시 공범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슬픈 영화다.


최성수|현재 장신대, 한남대, 한일장신대, 대신대에 출강하고 있으며, 책 <영화관에서 만나는 하나님>, <영화 속 장애인 이야기>, <영화 속 기독교>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