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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오직 내 시간이 유유히 흐르는 곳 | 청산도

빠르게 사는 도시를 떠나 터벅터벅 하루 종일 걷고 싶다. 비슷비슷한 얼굴이 비슷비슷한 노래를 부르는 음악에서 벗어나 자연의 소리에 귀를 채우고 싶다. 아깝다고 느껴지는 삯을 지불해야 앉을 수 있는 카페를 떠나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아 시원한 냉수 한 잔으로 가슴까지 적시고 싶다. 나를 위해 시간을 사용하고 싶다. 오로지 나만 위해. 그래서 청산도로 떠났다. 글·사진 김승환


메마른 감성을 자극하는 청靑

‘슬로우시티’로 지정되어 요즘 새삼 주목을 받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예부터 산과 물이 푸르다하여 붙여진 이름만큼 여름의 청록을 머금고 있는 섬, 청산도. 완도에서 출발한 청산도행 배는 경쾌한 엔진소리를 내며 펼쳐져 있는 섬들 사이로 미끄러지듯 40여분 정도를 뱃길
따라 흐른다. 다도해의 수평선 너머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작은 섬들은 시선이 움직이는 대로 신비함을 자아낸다. 손에 닿을 만큼 섬에 가까워지자 깊은 청산의 아름다움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콧속을 후비고 들어오는 찐한 바닷냄새가 이곳이 남도의 외딴 섬임을 알려준다.
일상의 바쁨을 잊어버린 듯한 고요한 섬의 아침은 도시의 아침과는 너무나 달랐다. 지난 밤, 서울에서 차를 타고 내려와 뜬 눈으로 새벽을 맞이했던 모든 수고가 한순간에 보상 받는 느낌이다. 정말 좋구나.
한껏 마음은 부풀어 있는데 벌써 빨강이와 흰둥이 등대가 반겨준 도청항에 배가 닿았다. 매표소부터 들려오는 남도의 구수한 사투리는 오랜만에 찾은 외할머니 댁을 찾은 듯하다. 단체 여행객들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버스를 타고 또 몇몇은 자가용을 몰고 저마다의 행복한 여행을 시작할 때쯤 나도 첫 여행지를 향해 첫걸음을 디딘다.

왈츠와 판소리가 어울려 내는 청聽

섬의 서쪽인 항구마을, 도청리를 지나 20분쯤 걸어서 도착한 곳은 당리 언덕. 보리밭과 돌담, 황톳길로 낯선 여행자를 반기는 이곳은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와 TV드라마 <봄의 왈츠>의 주 무대다.
먼저 눈에 들어 온 곳은 멀리서도 눈에 띄는 이국적 분위기의 <봄의 왈츠> 세
트장! 아름다운 언덕에서 봄의 왈츠를 들으며 한껏 재하(서도영 분)와 은영(한효주 분)의 순수한 사랑에 흠뻑 빠져 본다. ‘누구나 이런 곳에서 왈츠를 들으면 하염없이 사랑에 빠질 것같아.’ 그렇게 사랑의 환상에 취해 있을 쯤 어디선가 들려오는 구수한 판소리 한가락!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헤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진한 진도아리랑
을 불러 재끼며 내려오던 서편제의 유봉(김명곤 분)과 송화(오정해 분), 동호(김규철 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돌담길을 만난다.
“이년아 가슴에 사무치는 한이 이었어야 소리가 나오
는 벱이여~”하며 송화의 눈을 멀게 했던 유봉과 함께 동호를 만나 가슴 맺힌 한을 담아 밤새불렀던 송화의 소리가 담긴 초가집 주막은 그 모습 그대로다.
남도의 구슬픈 가락과 어우러
져 그들의 한을 함께 풀어내 주던 그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도닥리 바닷가는 파란 보리밭과 거무튀튀한 돌담 너머로 남해의 멋스러운 해변을 연출한다.







따뜻한 인심이 부르는 청請
상서리 옛 담장 길을 들러 섬의 북쪽까지 왔다. 미로 같은 돌담 마을을 통과하느라 꽤나 걸었나 보다. 걷는 동안 내 입에서는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가 계속 흘러 나왔다. 모두 일을 나갔는지 고요함만 드리어 있는 돌담 마을. 따가운 햇살에서 3시간이 넘도록 걸으며 아스팔트에서 쏘아대는 열로 어느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바닷바람만 뜨거워진 몸을 식혀주는 고마운 친구. 그렇게 진산리와 국화리를 지나 지리에 도착할 즈음 길가에 마주앉은 두 할머니께서 파래를 무쳐 한입에 넣으시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멈춰 선다. 꼬르륵 거리는 배를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허기를 눈치 챈 한 할머니께서 자기 집으로 따라오라신다. 광주리에 걸어 놓은 찬밥에 미나리무침, 말린 멸치, 깍두기를 차려 내놓으신다. 16살에 이곳으로 시집왔다는 할머니는 자식들을 다 뭍으로 보내셨다며 나를 보고는 너무나 반가워하신다. 밥 숟갈을 들고 게눈감추듯 연신 입에다 밥을 넣은 후에야 돌아서 “할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건강하세요”하며 인사를 드린다. 마주 잡아 주시는 두터운 손마디에 스민 우리네 정을 느끼며 나오니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저 멀리 넘어간다.



경쟁하듯 빠르게 사는 삶 대신 양보하듯 느리게 사는 삶이 훨씬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일깨워준 청산도. 푸름이 창연한 바다와 섬, 반가운 노래 가락이 들려오는 언덕, 인정 넘치는 부름이 자연스러운 곳 청산도. 넘실대는 파도를 타고 한없이 펼쳐진 바다끝에 시선을 고정하며 나를 만나고 싶다면, 그리고 고요하고 한적한 돌담 사이를 걸으며 돌 냄새와 마을 냄새에 취하고 싶다면, 청산도로 가보자. 섬은 언제나 그곳에 있으니까 말이다.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완도직행 버스(1일 4회 운영)를 타고 완도에서 청산도로 들어가는 배(1일 4회 운행- 40분 소요)를 타면 당도할 수 있다.
완도 여객터미널 (1544-1114)
www.chungsan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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