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하나의 인생을 마치 자신의 인생처럼 살아낼 때다. 배우의 모든 것이 발현되어 바로 그 사람인 듯한 인생을 살아낼 때 악하든 선하든 그를 향한 관객의 공감지수는 높아진다. 그런 강렬한 조우를 통해 실제 배우의 삶과 별개로 관객들이 인식하는 그만의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꼬리표처럼 따라 붙어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하는…. 배우 이민정이 각인된 <꽃보다 남자>, <그대, 웃어요>의 밝고 애교 있는 막내 딸 이미지는 그녀만의 매력을 한껏 드러나게 했다. 그녀의 말투와 표정, 몸짓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사랑스러움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그녀의 시간들을 짐작하게 한다. 따뜻한 울타리 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는 햇살 아래 아이를. 글 정미희 | 사진 탁영한
‘나’일 수 있었던 배역
MBC 드라마 <있을 때 잘해>, <깍두기> 등 조용한 분위기의 드라마를 계속해왔던 그녀에게 통통 튀는 하이틴 드라마 <꽃보다 남자>는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선배 연기자들 틈에서 긴 호흡으로 가야 하는 정극의 틀에서 벗어나 또래 친구들이 주축이 되어 함께 작업하는 동안 묻혀 있던 그녀의 매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잣집 외동딸 재경이 구준표 앞에서 슈렉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을 때, 친구 잔디 앞에서 점보라면을 먹어치울 때, 그녀의 표정에도 생기가 돌았다. 그렇게 재경을 살고, <그대, 웃어요> 정인 역을 만나며 그녀는 배우로서 한 계단 올라선 듯하다.
그녀는 드라마 <그대, 웃어요>를 만난 것이 천운이라고 했다. 나만 잘하면 되겠다고 하는, 모든 도구가 잘 갖춰진 작업장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원하는 작품이었다. “제가 약간 비음도 있고, 아기 같은 말투도 있는데, 감독님께서 그런 걸 많이 살려서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다른 때는 그런 걸 많이 깨려고 노력했는데, 있는 그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이민정을 원했던 작품은 명품드라마라는 찬사를 받으며 7개월 동안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작품의 성공과 더불어 그녀 자신도 얻은 것들이 많았다. “작업하면서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그냥 무조건 잘한다고 극이 사는 건 아니잖아요. 함께 연기했던 선생님들이 워낙 베테랑이셔서 제가 부족한 게 있어도 채워주시니까.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았는데, 이 일을 하면서도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렇게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호흡이 잘 맞아 정말 고맙고, 따뜻하게 작품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내보일 수 있었던, 사랑하는 작품을 만나기까지 그녀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갈림길에서 선택한 연기
그녀의 인생 목록에 연기가 포함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제가 2005년에 데뷔를 했거든요. 보통 20대 초반, 빠르면 10대 때부터 연기를 시작하는데 저는 20대 중반에 시작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친구들이 취업 면접 보러다닐 때, 저도 이 일을 시작했죠. 남들과 비슷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연기를 하려니 좀 늦은 거더라고요.” 대학 때 연출을 전공했던 그녀는 학교에서 올리는 뮤지컬의 주인공 역을 맡게 되면서 연기에 발을 들여놓았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성악 덕에 도맡은 주인공이었지만 몰랐던 연기의 매력과 재미를 알게 됐다. 그 뒤로 연극 무대에 오르며 차근차근 기본기를 다지던 그녀는 영화와 TV 드라마에도 도전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시작하면 어느 정도 역할도 맡고, 앞으로 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너무 더뎠어요. 문이 열리고 나면 그 다음 문을 여는 건 조금 쉬운데 처음에 그 문을 열기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많이 고민을 했죠.‘ 내가 이걸 하면 안 되는 건가’하는 생각도 많이 하고. 아니면 빨리 아니라고 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힘든 시기였어요.”
어둠이 드리운 긴 터널 속에서 그녀는 기도했다. 길을 달라고, 저에게 길을 주시면 미련 없이 그 길을 쫓아가겠노라고. 그 기도 끝에 만난 작품이 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였다. “이 길을 놓지 말고, 계속 가라는 이야기이신 것 같아서 조금 힘을 얻었어요. 그 때가 과도기였죠. 나이가 어리면 어리니까 조금 더 배워가자 했을 텐데, 대학졸업도 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 생각이 많았어요.” 누군가 먼저 찾아주지 않는 위치에서 수없이 문을 두드리며, 캐스팅 순위에서 밀려나는 아픔을 겪는 동안 스스로 위축이 되기도 했다. “아무래도 사람들한테 평가를 받는 직업이니까 내가 못나서,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렇게 찾아오는 순간의 휘청거림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해준 것은 가족이었다.
타인을 향한 마음 키우기
그녀가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너 길거리에 침 한 번 안 뱉고 살 수 있겠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아빠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줄은 알지만 실제로 경험하기 전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전에는 친구들하고 영화 보러 가도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세수 안 하고 새벽예배 가도 괜찮았는데, 이제는 달라졌잖아요. 나중에 아빠가 하신 말씀이 많이 생각나더라고요.” 입은 옷 하나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댓글을 달아서 평가하고, 자신이 한 말이 토막 나 사람들에게 전해져 오해를 사고, 자신의 등 뒤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듣는 것. 이런 일들을 어찌 쉽게 일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제 행동 하나하나에 평가를 들으니까 처음에는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걸까,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과 싸우다가 요새는 그런 걸 현명하게 넘어가야 이 일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걸 깨달아요.” 남들에게 주목을 받는 만큼 그녀 자신이 남을 수용할 수 있는 폭이 넓어져야 한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그런 시간을 지나며 또 다른 기쁨은 든든한 내 편이 생기고 있다는 것. 지난 3월에는 그녀의 공식 팬클럽이 창단되기도 했다. “저보다 엄마 아빠가 더 좋아하셨어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한 번 약속을 잡아서 오는 것도 힘든데, 저 사람들이 저렇게 줄을 서서 기다리며 너를 만나러 온 그 마음만 평생 잊지 말라고 하셨죠.” 남들은 하지만, 그녀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 타인을 좀 더 배려하고, 내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 알고 있던 단순한 것들도 부모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되새기게 된다.
가장 솔직한 순간을 기억하는 것
부모님은 이런 삶의 지혜뿐 아니라 신앙의 유산도 물려주셨다.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친척들까지 집안 전체가 절실한 크리스천이라 어렸을 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은 가족예배를 드리고, 식사기도 당번이 있어서 기도 준비도 해야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신앙이라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 익숙하고 편안하게 다가왔죠. 그래서 갑자기 믿은 다른 사람들처럼 불 같이 변하는 기회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늘 자연스럽게 믿음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감사해요.” 신앙심이나 인품이나 언제나 다른 사람의 본이 되셨던 친할머니 덕에 어머니의 신앙도 더 깊어졌고, 그것은 다시 그녀에게 전해져 신앙과 삶을 하나 되게 하고 있다. 어머니는 그녀가 스케줄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인터넷 설교라도 듣게 하시고, 아침마다 책상 위에 성경구절을 놓아 자연스럽게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밖에서 일하고 있을 때도 문자로 틈틈이 성경말씀을 보내주시는 덕분에 잠깐이라도 기도를 하는 습관을 놓지 않게 된다고.
그런 기도의 습관은 그녀가 연기할 때 감정을 이끌어내는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 “기도할 때는 우선 솔직해지잖아요. 사람들한테 이야기할 때는 100% 솔직할 수 없지만, 기도를 할 때는 내 안에 있는 힘든 것이나 아픈 것이나 고치고 싶은 점들을 솔직하게 말하잖아요. 그런 나의 가장 솔직한 모습을 기억했다가 연기할 때 ‘내가 그 감정에서는 그랬었지’ 하는 걸 떠올리며 도움을 받아요.” 대기실에 있을 때 아주 잠깐 잠깐씩이라도 기도를 하면, 가장 솔직했었을 때 그 감정이 기억이 나서 연기할 때 도움이 되곤 한다. 기도를 통해 가장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 연기 비결이라니 새롭다. “연기 초짜지만, 연기라는 게 제일 솔직해야 할 수 있는 거라고 늘 생각하거든요. 뭔가 흉내를 잘 내는 사람들이 연기를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그런 사람보다 솔직한 사람들이 한 번 뿜어져 나올 때 그 영향력이 더 큰 것 같더라고요. 솔직함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게 기도를 통해 솔직하게 만난 자신을 연기를 통해 다시 만나며 그녀는 그 분 앞에서 무르익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요즘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추석 개봉을 앞두고 영화 촬영에 분주하다. 의뢰인들의 사랑을 이루어주는 에이전시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을 통해 그녀는 처음 코미디 연기에 도전한다. 한 포털사이트를 통해 난치병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캠페인을 벌이며 자신이 그런 따뜻한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했던 것처럼, 작품을 통해 ‘세상이 따뜻하고 살만한 곳’이라는 느낌을 주는 감동과 따뜻함을 전하는 배우로 사는 것을 꿈꾼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돌아볼 줄 알고, 그 상처가 아물기를 기도하는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만나 세상이 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민정이 추천하는 영화 _블라인드 사이드
감독 : 존 리 행콕
출연 : 산드라 블록
어린 시절 약물 중독에 걸린 엄마와 강제로 헤어진 후, 여러 가정을 전전하며 커가던 ‘마이클 오어’는 건장한 체격과 남다른 운동 신경을 눈여겨 본 미식축구 코치에 의해 상류 사립학교로 전학한다. 그러나 이전 학교에서의 성적 미달로 운동은 시작할 수도 없게 되고 운동보다 하루하루 잘곳과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형편에 놓인다. 그를 발견한 ‘리 앤’은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낸다. 그녀의 덕분에 다시 운동을 시작한 마이클은 놀라운 기량을 발휘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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