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다 가는 길을 걸어가며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남들이 다 가지 않는 길을 걸어가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 위에는 이정표가 없다. 하지만 이정표가 없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면, 길 위에 그만의 표적이 남는다. 후에 사람들은 두고두고 첫 사람을 기억하며, 그 길을 따라 걷게 된다. 누군가처럼 되는 것보다, 누군가가 나를 닮고 싶게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 했던가. 너무나 닮고 싶은 그분을 따라 걷는 길 위에서 만난 배우 유선은 치열하게 길을 만들며 걷고 있었다. 너무 힘들지 않냐 물었더니 그래야 사는 것 같다고 답하는 그녀는 마치 치열하게 피어나는 시들지 않는 꽃 같았다. 글 정미희 | 사진 탁영한


<이끼>가 열어준 또 다른 문
얼마 전 영화 <이끼>의 무대 인사를 마친 그녀는 벌써 다음 작품 촬영으로 분주했다. 관객들이 <이끼>를 두고 작품에 대해 다양한 추측과 해석을 내놓는 동안에 그녀는 이미 다른 인물이 되어 살고 있었다. <이끼> 강우석 감독과 함께 작업하는 두 번째 영화 <글러브>(가제)에서 다정하고 따뜻한 여선생님이 된 그녀에게서 <이끼> 영지를 찾아내본다. “강우석 감독님에 대한 모든 배우와 스텝들의 전적인 신뢰가 있었던 현장이었어요. 함께한 배우들도 모두 베테랑이었고요. 각자 자기 캐릭터에 진지하게 몰두해 있는 팽팽한 현장 분위기가 스스로 긴장을 많이 하게 했고, 더 노력하게 했던 것 같아요. 같이 있어서 시너지 효과가 났다고 할까요. 같이 작업한 다른 배우들에 비해 저는 여러모로 미약했지만, 오히려 홍일점으로 있으면서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서 항상 설레고 행복한 현장이었어요.” 강우석 감독의 촬영 현장에서는 필름 리와인드rewind 과정이 없어 배우는 자신이 촬영한 화면을 한 번도 볼 수 없다고 한다. 배우들은 감정의 선이 잘 이어지고 있는지, 액션이 잘 연결되고 있는지에 대해 모니터하는 과정 없이 강우석 감독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바탕으로 움직인다고. 그래서 <이끼> 기술 시사 때, 그녀는 마치 스스로 관객이 된 것처럼 몰입해서 영화를 보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한층 더 깊이 강우석 감독에 대해 신뢰할 수 있었다.
“강우석 감독님이 정말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여배우를 등장시켰는데, 내가 도드라지면 안 되겠구나 하는 부담이 컸어요.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 안에 자연스럽게 영지가 섞여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했죠. 제가 홍일점으로 좀더 빛나고,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어요. 개봉 후 관객들의 반응을 체크할 때도 전체적인 균형이 이루어졌고,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였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제일 기뻤어요.” 그녀는 자신을 신뢰해주는 사람에 대한 감사함을 오래 기억하고, 그 사람에게 반드시 보답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작품 초반에 느끼는 불안함은 다름 아닌 그녀를 믿고 캐스팅한 사람과 그녀를 위해 험하고 궂은일을 하는 스텝들에게 자신이 연기로 신뢰를 줄 수 있는가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을 찾았을 때, 그 기대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에 항상 치열하게 맡은 역할의 삶을 살아냈다.


집착하는 유일한 하나, 연기
그녀의 필모그래피에는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첫 스크린 데뷔작 <4인용 식탁>의 영화 전반에 흐르던 불안한 정서를 시작으로 미스터리 공포물 <가발>, 스릴러 <검은 집>, 최근작 <이끼>까지 그녀가 그동안 영화를 통해 맡았던 역할은 모두 격정적이었다. 겪어내야 할 감정의 폭이 크거나 삶이 두려우리만치 힘겹거나 격렬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매번 여타의 여배우들이 쉽게 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작품을 선택할 때 캐릭터 위주로 선택을 해요. 캐릭터가 겪고 있는 상황이나 감정을 많이 고려하죠. 제 취향 자체가 편안하고 부드러운 것보다 격정적인 것에 많이 끌리는 것 같아요.” 물론 격정적인 역할일수록 촬영 중에 겪는 감정 소모가 극심하지만, 해내고 났을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크단다. “제가 원래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모험심이 별로 없어요. 예를 들어, 여행을 갈 때도 철저히 내가 다 공부하고 계획한 곳만 가요. 굉장히 두려움이 많고, 겁도 많은 편이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연기에서 만큼은 도전의식이 생겨요. 어떤 여배우가 하더라도 잘할 것 같은 역할은 재미가 없고, 저와 잘 매치가 되지 않는 그림에 더 끌려요. 제가 그 역할을 맡아서 뭔가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할까요.” 그런 개척정신이 다른 여배우들과 다른 그녀만의 느낌을 만들어 냈다. 정말 자신만 유독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택한 길이었다. 격정적인 인물을 선택했기에 그녀가 한 인물을 살아내는 과정은 더 치열하다. 맡은 인물에 대해 개인적인 연구와 치밀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녀의 컴퓨터에는 맡았던 배역을 글로 기록한 자료들로 빼곡하다. “제가 미리 생각하는 건 그 작품에서 필요한 관계 정리, 감정의 흐름 정리, 왜? 라는 질문들이 있어요. 이 인물이 왜 여기 있으며,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 등의 질문을 계속해요. 연기를 하는 데 있어서 인물의 행동과 감정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동기부여를 하는 거죠.”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연기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열정이 전해져 온다. 그것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일에 대한 욕심인지, 내 자아실현에 대한 꿈인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집착하는 하나가 연기에요.”

마침내 오르고 싶었던 꿈이라는 산
그녀가 연기에 대한 꿈을 꾼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였다. 하지만 좀 더 완성되고 정리된 연기를 배우고 싶어 대학교에 가서 배우리라 결심을 했단다.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하면서 그 오랜 꿈에 날개를 단 듯 했다. “학교 동기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 학교에 들어온 동기가 고3 때 문득 해보고 싶어서라고 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뭔가 모르게 나는 다른데. 단순한 경쟁 심리에서가 아니라, 한순간 증폭된 관심으로 진로를 결정한 아이들과 꾸준히 이것만 바라보고 온 나와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나는 깊이 있게 뭔가를 보여줘야 된다는.” 그래서 열심을 다했는데, 1학년 1학기 연기 실습 성적이 F였다. 충격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교수님께서 넌 네 마음을 자물쇠로 단단히 잠그고 있다고 하셨어요. 제 안에 그동안 꺼내놓지 못한 많은 사연들이 너무 많은데, 그걸 제 서랍이라는 곳에 꼭꼭 가둬 버렸다고요. 그 자물쇠를 열지 않으면 밑바닥에 있는 감정들을 끄집어내지 못한다고 하셨죠. 선생님은 제자가 한 명의 배우로서 성장해 나가는 데 있어 충격과 자극을 주고, 그렇게라도 해서 제 안에 있는 아픈 기억들이나 힘든 시간들을 폭발하듯이 다 터트려주고 싶으셨대요.” 그 선생님의 영향으로 그녀는 연기에 대한 오기가 생겼고, 그 다음 학기부터 한 번도 꺼내놓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자신의 온감정과 생각을 쏟아 자신의 꿈에 집중되어 있던 마음을 열고, 세상과 소통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간들이 연기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그 후로 학교 정기공연으로는 다 채울 수 없었던 연기에 대한 갈증을 채우려고 영화 오디션도 수없이 봤고, 학전에서 뮤지컬 <모스키도 2000>과 연극 <날 보러 와요>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오디션에 번번이 실패하면서 현실과 뼈 아픈 직면을 하게 됐다. “내가 정말 기회만 있으면 잘할 것 같지만 그건 내 마음이구나. 남들이 바라볼 때 기본적으로 나한테 없는 게 너무 많구나. 연기보다는 화려한 외모나 체격조건이 유리한 친구들이 훨씬 기회를 잡기 쉽다는 걸 느꼈어요.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고 힘들었죠.” 그 무렵이었다. 아르바이트로 인터넷 방송에서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KBS <영화 그리고 팝콘>이라는 프로그램에 배우 문성근의 파트너 MC로 채용된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이런 기적도 일어나는구나 싶었죠. 다들 제가 아나운서인 줄 알았다가 배우인 것을 알고는 연기는 어떻게 할까를 궁금해 하셨어요. 그래서 갑자기 KBS MC를 보고 있는 저에게 MBC 미니시리즈에서 연락이 와서 주인공으로 캐스팅이 됐죠.” 힘겨운 도전 끝에 얻어낸 기적 같은 기회들 앞에서 그녀는 순간 우쭐해지고, 교만한 마음이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시련의 시간을 마주하게 됐다. 아무도 찾는 이가 없고, 아무 일도 성사되지 않는 그야말로 암흑 같은 시기였다. 두려움과 절망감으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
그 시절, 눈물로 기도의 씨앗을 뿌려 만난 작품이 영화 <검은 집>이다. 여자 사이코패스 역할로 보자마자 너무 탐이 나 원작 소설을 읽고, 사이코패스에 대해 연구하고, 인물에 대한 조사를 끝낸 후 감독을 만나 그 역할을 왜 하고 싶은지, 자신이 하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감독은 쉽게 결정을 내려주지 않았다. “2주만 시간을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2주 동안 정말 열심히 기도했는데, 캐스팅 됐다는 전화를 받고 정말 얼마나 울었는지. 너무 은혜로워서 이 시간을 내가 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노트를 펴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함을 적어 내려갔어요. 가끔 그걸 보면 너무 웃긴데(웃음) 그 때 당시에는 정말 절실했어요.”
하지만 여러 작품을 거쳐 오면서 항상 주변인으로, 두 번째 느낌만으로 봐주는 역할에 대한 상처가 있었다. 힘든 마음에 딱 한 번만 날개를 달고 비상을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을 때, <솔약국집 아들들>을 만났다. 열정적으로 다시금 신명나게 연기하며 마음껏 행복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순간은 그 순간에는 잘 몰라요.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지나고 나면 너무나 내가 간절히 원했던 거라는 걸 깨닫죠. 언젠가부터 안 되는 일이 있으면 더 좋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항상 가장 좋은 걸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나니 안 되면 그냥 미련이 없어졌어요. 예전에는 기도했는데 안 주시면 그것 때문에 상처 받고, 마음이 상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목숨 걸지 않아요. 저한테 주시는 건, 꼭 흥행이 되어서 좋은 작품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의미를 주시기 위해서, 인연을 닿게 해주시는 거라는 걸 이제는 좀 알겠어요.”

SCFF 레이디로 섬기는 기쁨
그녀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제8회 서울기독교영화제 홍보대사직도 기쁨으로 맡을 수 있었다. “저를 세워주시면 그렇게 세워주신 존재감으로 제가 할 수 있는 하나님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겠다고 약속드렸어요. 제의가 왔을 때 어쩌면 이 일이 하나님께서 이제는 네가 좀 서야 되지 않겠냐는 의미에서 주신 기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들었어요.” 그렇게 참여한 기독교영화제가 기독교인들만의 영화제가 되지 않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관심을 두고 대중문화의 일환으로 그냥 접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메시지와 신앙을 접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기독교인들의 잔치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의 일환으로 화제가 되고, 이슈가 되어서 문화를 매개체로 이용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죠.” 그녀와 함께 할 서울기독교 영화제가 더 기대된다.

그녀는 예전에 복수를 위주로 했던 드라마에 참여하면서 다른 사람을 향한 나쁜 마음, 미워하는 마음,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을 품고 연기하니 스스로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 작품을 통해 자신이 연기하면서 마음에 부대낌이 없고, 관객들도 좋은 에너지와 좋은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고. 올해는 영화<이끼>를 통해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이야기, <글로브>를 통해서 소외된 아이들의 꿈 이야기, 장진 감독의 <로맨틱 헤븐>에서 천국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나 행복하다는 그녀. 너무나 자극적인 영화들이 대세를 이루는 영화 시장에서 조금 더 이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고, 인간의 선한 본능과 선한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을 함께 나눈다. 그 자리에서 배우 유선이 선한 빛을 내기를.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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