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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지금 여기, 순례는 계속된다 l 청년 순진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자, 스페인의 수호성인 ‘야고보’의 에스파냐어 이름인 산티아고. 그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순례 코스를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라고 부른다. 파울로 코엘료는 산티아고를 걸은 후 작가가 되었고, 그 때의 경험을 담은 <순례자>라는 책을 썼다. 제주 올레를 만든 서명숙 씨는 산티아고를 걷다 아름다운 고향 제주를 떠올리고, 돌아와 올레길을 만들었다. 지난 1200년 동안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 이곳을 찾았고, 길 위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 길에는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자신만의 언어로 그 비밀을 말하는 많은 사람 중 한 청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한쪽 발목이 불편해 20년 동안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워하며 살아왔지만, 날마다 커지는 ‘떠나라’는 마음의 소리에 승복하고 길 위에 섰다고 했다.  글 정미희 | 사진 김준영

떠날 수 없는 이유, 떠나야 할 이유가 되다
순진이 처음 산티아고 길을 알게 된 건,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통해서였다. 보물을 찾아 길을 떠난 양치기 산티아고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만나는 사람마다 그 책을 읽었냐고 물었고, 그 책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기사를 통해 그 길이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고 꼭 한 번 가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발목의 통증을 생각할 때마다 “어떻게 내가 감히…”라는 말로 귀결되곤 했다.
그녀의 아픔은 9살 무렵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열 살 이후로는 달리기를 해본 적도 없었고, 오래 걷거나 서 있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미칠 듯한 통증으로 잠 못 드는 날이 계속 되고, 그녀의 사춘기는 오로지 집과 병원을 오간 기억뿐이었다. 병원에서는 통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를 걱정했다. 하지만 어떤 병원과 의사도 치료법은커녕 통증의 이유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던 고2 무렵, 이 상태라면 두 달을 버티기 힘들 거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 달이 지나도 삶은 계속 되었지만,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그 후로 모든 결정과 선택 앞에는 ‘두 달 뒤에 내가 죽는다면’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무슨 일이든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목숨을 건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많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아파서 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산티아고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길 위에 서라’는 마음의 소리와 떠나게 하는 많은 일들 앞에서,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길위에 서다
떠날 결정을 했지만, 아픈 발목을 자극하지 않는 등산화 하나 찾기도 어려운 현실의 벽에 마음은 무너졌다. 그런 마음을 다독여 다 가지 못해도 좋으니 그저 이만하면 됐다 할 만큼 느릿느릿 산보하다 온다고 생각하자 하고 길을 나섰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는 거리상으로 800킬로미터, 보통 사람들의 걸음으로 한 달 정도의 여정이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올 날짜도, 어디까지 갈지도 정하지 않은 채였다.
살면서 맞이했던 수많은 죽을 고비가 그곳에도 있었다. 식중독에 걸려 숙소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이 앓고 있었을 때였다. 숙소로 찾아든 한국인 모녀가 낯모르는 그녀를 밤새 간호하며, 슈퍼에서 쌀을 사다가 미음을 끓여 먹여주었다. 계속 게워내길 반복했지만, 한 숟갈이라도 먹이려고 애쓰는 손길의 힘으로 다시 기운을 찾게 되었다. 정신이 돌아오자 원망이 쏟아졌다.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당신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그 때, 미음을 끓여주신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이에요. 이렇게 아프고 무력한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요.” 머릿속에서 징이 울리는 듯 했다.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든 게 나구나’라는 깨달음에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의 동생은 루게릭병 말기로 안면 근육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던 것. 이름 모를 천사는 동생에게 주려고 떠가던 성수 한 통을 순진에게 남기고 떠나셨다. ‘순진 씨, 당신에게는 좋은 재능과 착한 마음이 있습니다. 힘내시고 이 길을 통해서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라는 쪽지와 함께. 그 깊은 마음이 담긴 성수를 한국에 가져와 암을 앓고 있는 세 살 배기 지인의 손녀에게 전해주었다. 성수의 힘에 사랑과 정성이 보태진 탓이었을까. 아이는 암에서 치유되어 건강하게 살고 있다. 그렇게 길 위에서 만난 천사들과 친구 삼으며 고통 중에도 기쁨이 새록새록 생겨났다.
그녀는 늘 남들만큼 걷지 못하는 것에 창피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천천히 자신만의 호흡으로 걷기 시작했고, 그 느린 걸음으로 더 풍성하게 길의 아름다움을 만끽하였다. 가진 것 없어도 서로 나누는 마음, 타인과 상대방의 선의에 나를 맡기는 마음, 그런 마음과 만나 즐겁게 3개월의 여정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든 포기하고 떠나려던 마음을 이겨내고, 마지막 도착점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녀는 막연히 산티아고 순례를 마쳤을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발목의 통증이 깨끗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길의 끝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실망했고, 고통스러웠던 여정의 끝은 허무함이라는 감정이었다. 뽀로통한 마음으로 마지막 순례자 미사를 드리다 ‘다 나았다’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는 무너졌다. 쏟아지는 눈물 가운데 치유됨을 느꼈다. 다리의 통증은 여전했지만, 그녀의 인생을 가로막고 있었던 고통! 그 고통을 넘어서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밤새도록 멎지 않는 통증도, 배고픔도, 추위도, 외로움도, 절망도 이겨낸 강한 사람이었다.



다시 순례를 떠나다
돌아와 생각하니, 그녀는 <연금술사>의 양치기 산티아고였다. 저 멀리 보물을 찾으러 떠났지만, 결국 보물은 고향집 앞마당에 있었던! ‘내가 연금술사를 그대로 체험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순례 후에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절망한다고 한다. 길 위에서는 편안했던 삶을, 돌아온 삶 앞에서는 아름다웠던 길을 생각하며 사는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순진에게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완전히 변하기도 했다. 부모님과 관계도, 다리의 통증도, 자신의 일도,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순진이 변함으로 현실은 변했다. 늘 부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결국 세상 사람들 모두 자신의 깜냥대로, 자신만의 배낭을 메고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볍고, 더 많이 즐거워지고, 편안해졌어요.” 그녀는
이제 ‘모든 변화의 구심점은 나’라는 진리 앞에서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변화를 기대하며, 그 길 위에 서기를 원한다. “제가 거기서 친구들에게 물었어요. 여기 다시 오고 싶냐고, 그랬더니 모두 ‘yes’라고 대답했어요. 그럼 다른 사람에게도 오라고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모두 ‘no’라고 대답했어요. 그렇게 걸으면 안 되는 길이기 때문이에요.” 자신만의 내적인 동기가 있어 떠나오지 않고 여행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품고 온 사람들은 내내 힘들어하고, 불평하고, 중간에 포기하기도 했다. “만일 마음의 소리를 따라왔다면 격려해주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갔다오니까 너무 좋더라. 너도 한 번 가봐. 이렇게 말할 곳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녀는 책을 통해 만난 한 독자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산티아고를 너무너무 가고 싶어서 여행기를 읽다가 제 책을 만난 독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제 책을 다 읽고는 ‘아, 거기 갈 필요가 없구나’라고 느꼈대요. 그게 정말 감사했어요. 제 마음과 의도를 정확히 읽어주신 것 같아서요. 저는 몰라서 그곳에 갔지만, 카미노는 꼭 스페인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녀는 삶 자체가 카미노며, 매일의 일상에 충실한 것이 카미노를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과 같다는 진리와 직면했다. 결국 삶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를 가는가, 무엇을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하는가라는 것을 깨닫는다. 표지는 사방에 있고, 노란 화살표는 스페인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보려고 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게 표지다.

쓰고 나니, 책은 자신이 쓴 것도, 자신의 것도 아닌 그저 심부름을 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그 심부름 값으로 그녀는 요즘 많은 사람들과 관계 맺는 축복을 누리고 있다. 사람들은 다 예쁘다며, 배시시 웃는다. 그리고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하며 나태주의 <풀꽃>을 읊어주었다. 그녀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했다. 누군가한테서 받은 이야기를 나르는 심부름꾼이….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지를 따라 살아가는 길 위에서 그녀는 오늘처럼 또 흔들리며 피어날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순.진.한.걸.음   
순진|샨티
순진에게 ‘나도 언젠가 저 길을 걸어보았으면’ 하고 마음속에 오랫동안 소망을 품어온 열망의 길, ‘어쩌면 그 길 위에서 다리 통증이 치유될지도 모른다’고 믿은 기적의 길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8년을 소원하고 기다린 끝에 보통 사람들이 한 달여 만에 걸어내는 길을 석 달에 걸쳐 걷는다. 그녀가 발견한 카미노의 진짜 기적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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